골프는 4명이 함께 잔디밭을 이동하면서 골프채를 이용하여 자신의 공을 홀컵에 넣는 경기입니다. 골프는 타수가 적어야 기분이 좋고 골프채 운동을 적게 하고 타수 잘 나왔다고 기분 좋아하는 스포츠입니다. 흔히 말하는 주말골퍼들은 100돌이라 해서 95~100타를 오가면서 이 타수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땀을 흘리며 산 정상에 올라가서 '야호'하면서 기분 좋아합니다. 반면 정신과 신체 건강을 위해 나선 골프는 운동내용보다는 타수를 가지고 그날의 운동 결과를 평가합니다. 타수가 적으면 운동량이 적은 것이고 타수가 많으면 운동을 많이 한 것인데 운동을 많이하면 화가 나고 운동을 적게 하고도 기분 좋아하니 골프를 하지 않는 이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처럼 오묘한 골프를 골프라 말하지 않고 '운동'이라고 말하게 된 이유는 과거 일부 층에만 허락된 골프를 대놓고 말하기 어려워서 그리 한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아마도 자신들만의 귀족 스러운 운동으로 신비감을 주기 위한 이유도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합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누구나 편안하게 ‘골프 간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1980년대에는 절대 비밀이었고 그래서 골프장에 가면서 '골프장에
언론에 장문의 글을 쓰고자 한다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공보관’, 즉 대변인이라는 직위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첫 번 소재로 삼고 싶었다. 1999~2007년까지 경기도청에서 근무하신 여섯명 공보관 또는 대변인에 대한 이야기다. 1999년에 처음 아웃소싱 공보관을 만났다. 당시에는 별정직 4급 공무원이다. 중앙에서 언론이나 언론홍보에 근무한 경력이 짱짱한 분들이 채용되었다. 그동안 공조직 안에서 상하좌우 짜임새 있는 근무 틀에 익숙한 분들과 근무해 왔는데 이분들은 파격적이었다. 민간에서 경험한 바를 행정에 성공적으로 접목했다. 화재 현장에 택시 타고 달려가는 열정을 배웠다. 도정에서 언론 관련 사건이 뜸해지면 금연에서 발생하는 '금단현상'을 겪는다고 했다. 공보관실#대변인실은 늘 언론 관련 사건들이 줄지어 들어서야 직성이 풀린다는 말이다. 민간에서, 정치에서, 행정 밖에서 행정을 컨트롤하는 황소의 고삐조차 없는 무중력의 정치적 공간에서 날아다니시던 분이 행정, 도정이라는 고삐에 묶이고 공보관, 대변인이란 공인명함을 들고 일하시는 과정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이분들을 제대로 보좌하기란 쉽지 않았다. 우선은 행정 시스템을 민간기업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당시
경기도공무원 대부분이 근무하는 사무실, 즉 경기도청 청사는 서울 광화문에서 시작됩니다. 도청의 전신인 京畿監營(경기감영)은 서울 한성부 내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청 청사가 서울시에 있는 것은 경기도민의 자존심이 허락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1953년 4월 15일 경기도 인천시에서 먼저 ‘경기도청 유치위원회’가 발족되자 1주일 뒤 수원시에서도 ‘경기도청 수원 존치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存置(존치)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조선시대에 수원에 경기도 감영이 있었고 6.25전쟁 당시에도 임시도청이 설치된 적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962년에 수원의 지역 유지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도청을 수원으로 이전하자는 건의서를 제출하였는데, 1963년에 박창원 경기도지사는 청사를 시흥군 안양읍에 이전하자고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이병희 수원유치위원장(제6,7,8,9,10,13,15대 국회의원)이 도의 발전과 미래를 생각하며 삭발까지 감행해 박정희 의장에게 찾아가 무릎을 꿇고 도청 이전을 요청하였던 바 1963년에 법률 제1538호가 제정되어 수원으로 결정되고 팔달산에 청사를 준공하여 1967년에 '서울도청'이 수원시에 移轉(이전)했습니다. 참고로 공사비
2023년에서 49년전인 1974년으로 잠시 돌아가보겠습니다. 6.25전쟁 휴전 21년쯤이고 박정희 대통령, 김종필 국무총리 시절(1971년 6월 4일~1975년 12월 18일)이고 시골마을에는 정당 간부출신이 면장을 하시고 동네마다 서로서로 이장을 하겠다고 경쟁을 하였습니다. 공직사회에서는 새로운 물결이 일어나고 정부에서는 공직의 정의를 세우기 위해 이른바 '서정쇄신'의 칼바람이 일어나던 시기입니다. 정부는 1975년부터 서정쇄신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습니다. 서정쇄신은 공무원사회의 모든 부조리를 일소하여 능률적이고 명랑한 봉사행정을 폄으로써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여 국정능률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공무원 혁신운동이었습니다. 동시에 이를 사회전반에 걸친 부조리와 비능률을 제거하는 사회정화운동과 새로운 가치관에 바탕을 둔 건전한 국민정신을 진작시키는 정신개혁운동으로 승화시켜 부유한 나라를 만드는 민족중흥을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서정쇄신으로 안타깝게 공직을 떠난 이가 있었고, 어느 조직에서는 이른바 인기투표를 해서 조직 배제대상자를 결정했다고 합니다. ■ 시골마을 전화기와 인터넷 당시에는 인터넷이 공직사회는 물론 서민사화에도 없었습니다. 요즘처럼 SNS가 다양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