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강원도 영월군의 단종왕 장릉과 청령포를 둘러보고 법흥사 적멸보궁에서 108배를 올리려 했지만 하루 200mm폭우가 온다는 예보가 있고 이미 어제까지도 큰 비가 내렸으므로 일주일 연기하기로 하였습니다. 일주일 후에는 폭우도 없고 더위도 조금 지나갈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방문을 위한 예약이나 현지의 약속이 없으니 여행자끼리 논의를 하면 연기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편히 연기하고 오늘 토요일은 집에서 쉬기로 했습니다. 혹시 법륜사에 가거나 더 가까운 봉령사에서 절을 올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200mm폭우가 와도 고속도로나 국도는 안전하고 비로인해 교통량이 줄어서 평온하게 운행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비내리는 강원도 영월의 풍광을 볼 기회가 비내리는 날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비가 오는 낭만적인 풍경속에서 시상을 얻고 글의 소재를 발굴하는 기회도 얻은 것이지요. 도전하는 자에게 얻음이 있는 것이니 다른이들의 사건사고에 밀려서 일정을 미루는 것이 반드시 정법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보기는 합니다. 하지만 배부른 소리이고 안전이 제일입니다. 안전해야 다음이 있습니다. 작은 안전사고로 넘어지기라도 해서 팔다
그동안 언론에 써 올린 글에 댓글을 달기도 하고 서로서로 격려하는 사이인 문제열 박사의 글에 찬사의 말을 적어올렸습니다. 품앗이라고도 하고요, 커피점에서 서로서로 날씬해졌고 예뻐졌다고 칭찬하는 소녀들의 대화와도 같다 하겠습니다. 사실 자화자찬보다는 다른 이의 마음을 빌려서 자신의 존재감을 키우는 것도 필요한 시대입니다. 독불장군은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므로 후대에 전해지는 스토리가 없습니다. 격투기 중계를 보면 낯익은 선수가 대개 승리합니다. 낯이 익다는 것은 자주 출전한 것이고 승리를 해야 다음 토너먼트에 올라가고 최종 대결에서 챔피언이 되는 것입니다. 얼굴이 시청자들에게 익혀진 선수는 승률이 높다는 말입니다. 경기에서 이기니 방송에 자주 나가는 것이고 인상적인 승리의 장면을 시청자들이 기억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글을 쓰는 분들도 주변의 지인이나 네티즌들의 댓글이 필요합니다. 페이스북에서 글 한 번 올리면 좋아요 200, 댓글 80은 기본인 몇 분이 있습니다. 이분들의 특징은 다수의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좋아요’든 댓글이든 꾸준히 품앗이를 한다는 점입니다. 본인이 남에게 들인 정성만큼 거두어 들인다는 역사적 진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실천하지 못합니다. 내
생연동 4동사무소 인근의 어르신을 만나러 갔습니다. 김방남, 윤명구, 목영달, 이상국, 오병용, 김기준, 목공어르신(91세), 이강석, 최경화입니다. 춘천 감자탕이라고 동장때 새마을지도자 하신 분이 지금도 부부가 운영하시는데 코로나19의 상황에서도 손님이 많습니다. 중짜 3, 라면, 밥3공기, 소주3명을 드셨습니다. 3분만 소주를 드십니다. 목공어르신은 부시장으로 다시와서 반가웠는데 어느 날 스르르 전근을 가서 섭섭했다 하십니다. 동장으로 근무하다가 떠날 때는 모든 어르신께 인사드리지 못했습니다. 부시장을 마치는 날 생연로에 인사를 다녀왔지만 그날은 목공어르신을 뵙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손을 잡고 가시자 했습니다. 치아가 없으시니 못드신다 하셨지만 감자탕이니 부드러운 고기와 면발은 드실 수 있다며 손을 잡아끌고 모시고 갔습니다. 외롭게 사시니 사람이 반가운 것입니다. 어르신들은 사람이 그립습니다. 준비해간 백세주는 다음에 드시라 드리고 목영달 사장님이 주신 마늘, 감자 자루를 싣고 수원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동장 때 다닌 길이 아니라 새로 건설된 고속도로 몇 개를 갈아타고 시원스레 달려왔습니다. 그렇게 동두천시 방문을 마쳤습니다. 지난번 동장이임 편지를 보관
고찰을 바라보면서 이 사찰에서 수도생활을 하신 고승들이 수십명, 수백명, 수천명에 이를 것이고 소실되어 재축하는 과정에서 고된 공사장 생활을 하신 스님도 참 많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주변의 이름없는 민초들이 불심으로 달려와서 공사를 돕고 평생을 이곳 주변에 살다가 부처님의 나라로 가셨을 것입니다. 중생이 아무리 건강하고 불심이 높아도 90세 전후에는 떠나게 되고 이제는 조선시대의 어르신이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1910년생이면 이제 111세이시니 최근 별세하신 100세 어르신이나 101세에 강의를 다니시는 분들도 1920년대생이고 1919년 3.1운동 이후에 태어나신 분이니 조선시대의 어르신은 없습니다. 1958년에 태어나 보니 조선시대 인물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1905년생으로 기준하면 1958년에 53세이니 당시 시골동네 어르신 대부분이 조선시대 인물이었습니다. 고종황제를 임금으로 모시고 살았던 분들입니다. 해방을 맞이하고 남북간 분란을 목도하시다가 6.25전쟁으로 엄청난 고생을 하신 분들입니다. 전후의 어려운 시기, 개발행정시대, 오일쇼크, IMF사태, 금융실명제, 금모으기 쇠붙이 모으기에 동참하신 분들입니다. 이제 살만하다 하니까 요즘 코
어느 장터에서 장사꾼이 장사를 시작했다. 이 창으로 뚫지 못할 방패가 없다. 잠시 후에 둥근 방패를 들고 나왔다. 이 방패로 막지 못할 무기가 없다. 창이든 칼이든 다 막아내는 튼튼한 방패라는 것이다. 그러자 구경꾼 중 한 명이 그럼 세상에 뚫지 못할 것이 없는 이 창으로 세상에서 막지 못할, 도저히 뚫을 수 없는 방패와 겨뤄보면 어떠하겠는가 제안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듣고 보니 말하고 보니 참으로 모순된 일이기 때문이다. 矛盾(모순)이다. 矛(창모)盾(방패순). 어처구니가 없다. 1811년 홍경래의 난 때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에 연좌제의 의해 집안이 망했다. 당시 6세였던 김익순의 손자 김병연은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후에 사면을 받고 과거에 응시하여 조부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답을 적어 급제하였다. 그러나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고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공무원이 일을 열심히 해야할 부서가 있고 적절하게 근무할 부서가 있는 것 같다. 기획부서, 예산부서,
8월5일 말복의 아침이 장마와 습기와 함께 시작합니다. 말복이란 초복, 중복 다음의 더위입니다.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이 있듯이 상중하가 이어지듯이 3단계로 이어지는 더위입니다. 추위는 소한과 대한입니다. 중한은 없습니다. 하지만 대한이가 소한이네 왔다가 얼어죽었다는 옛 어르신들의 곁말이 있듯이 말복이 반드시 더 더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여름이라 덥고요, 108배를 올리니 75배에서 땀이 흐르고 떨어지고 배를 마칠 즈음에는 이마한가득 땀범벅입니다. 감자를 삶아서 으깨면 범벅이 되고 이를 둥글게 접시에 담아냅니다. 묵을 먹고나면 잘잘한 조각이 남습니다. 그래서 수해로 마구 엉킨 모습을 묵사발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사실 묵은 참 좋은 음식인데 그릇에 담아도 쉽게 부서지므로 사람들은 물건이 엉킨 모습을 보면서 묵사발로 비유합니다. 주먹다짐으로 멍이 들고 피가나면 얼굴이 묵사발이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어제 받은 외부기관은 전화는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합니다만 과묵하게 그냥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혹시 그냥 평온하게 잘잘한 이야기를 전했을 뿐인데 무게있게 받아들이는 것도 나이든 자의 대응자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업계에서 이 같은 일을
정치인의 기사는 부음란만 아니면 된다는 말이 있다. 좋은 일은 물론 불편한 사건이라도 기사가 나야 정치인답다는 말로 풀이된다. 혹시 부정적인 내용은 시간이 지나면 걸러지고 본인의 이미지만 남게 될 것이라는 기대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언론을 통해 누군가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뇌리에 간직하게 될지도 모른다. 1889년 3월31일 프랑스 파리에는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을 맞이해 열린 만국박람회의 기념 조형물로 에펠탑이 세워졌지만 수많은 시민들이 탑 건립을 반대했다. 15,000개의 금속조각, 2,500,000개의 나사못으로 연결시킨 무게 7,000톤, 높이 320.75m의 철골 구조물이 고풍스러운 파리의 분위기를 완전히 망쳐 놓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년이 지난 1909년 다시 철거논의가 거세졌지만, 탑 꼭대기에 설치된 전파송출장치 덕분에 살아남았다. 이후 시민들이 날마다 보는 에펠탑에 정이 들어가듯 단지 자주 보는 것만으로도 호감이 증가하는 현상을 '단순노출의 효과' 또는 '에펠탑 효과'라고 한다. 정치인의 기사도 그러하니 광고는 더욱 중요하겠다. 요즘에는 아예 대놓고 프로그램중에 광고를 한다고 알린다. PPL(product placement a
월에 한 번 정도 부부가 도계를 2~3번 넘나드는 여행을 간다. 지인 부부 4명이 한 팀이 되어 어느 목적지를 정한 후에 시원하게 고속도로를 달려가다가 경기도내 휴게소에서 이천쌀밥, 안성국밥, 양평해장국을 먹는다. 점심에서야 다음 행선지를 정한다. 그러기 위해 오며 가며 만나는 관광지, 유적지 간판을 유심스럽게 살핀다. 예약도 없고 누구를 만나는 약속도 없으니 급하지 않고 여유롭다. 한 분이 의견을 내면 3인이 따라가는 방식이다. 지난 여름 지루했던 장마때는 새벽에 폭우가 내려서 회의결과 당초 목적지의 절반거리인 추풍령휴게소로 잡았다. 안성휴게소에서 국밥을 먹고 추풍령에 도착하니 비가 그쳤다. 다시 당초 계획대로 가야산 국립공원에 안착했다. 하루 600km 여행을 하면서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워졌다. 전국을 연결하는 길고 짧은 고속도로가 경부축을 중심으로 촘촘한 그물망 도로망이다. 인제-양양터널은 10,965m이다. 비 오는 인제터널에 진입후 10km를 달려 양양터널을 나오면 맑은 하늘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오뉴월 소나기는 소의 등을 가른다 했다. 소 잔등을 2m로 계산하면 5,000두를 나란히 세운 거리다. 1998년 정주영 현대회장님 방북 소떼가 1,00
전에는 현직이라서 지방신문사에 창간을 축하하는 축전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민간으로 돌아오니 그런 일이 없습니다. 그냥 먼 발치에서 축하하고 지난날의 기억을 회고할 뿐입니다. 1988년 7월4일에 문화공보담당관실로 발령을 받았고 언론계에서 도정자료를 바탕으로 보도자료를 작성하여 기자실에 배포하는 담당을 하게 되었습니다. 공보실에 가니 언론사는 경향신문,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한국경제, KBS, MBC가 기자를 보내서 취재를 하고 있습니다. 지방지는 1988년 상반기에 경인일보 하나입니다. 이른바 1도1사의 대표로서 경기와 인천을 취재와 보도지역으로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88년에 3개사가 창간되었습니다. 1988년 7월15일에 인천일보가 창간되고 7월20일에 기호일보가 창간호를 배부해왔습니다. 경기일보 창간일은 8월8일입니다. 이후 기존 경인일보 기자와 함께 4개사 기자들이 도청내외를 휘졌고 다니면서 취재를 하고 보도를 하면서 언론 전성시대를 열었습니다. 발령 한달 정도는 경인일보 기자에게만 자료를 체크하였지만 이후에는 4개사 기자, 특히 경기일보 기자의 취재동향에 맞춰야 했습니다. 경인일보, 경기일보 기자가 취재한 자료를 풀 자료로 배부한
三寒四溫(삼한사온)처럼 4일정도 지루한 장마 비가 내리는 경우는 보았지만 올해처럼 이렇게 긴 기간동안 많은 비가 내리는 것을 본 기억은 없습니다. 인생중 가장 긴 기간동안 매번 폭우가 내리는 상황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인명의 피해, 재산 손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산사태로 집이 땅속으로 들어간 듯 집안에 토사가 밀려들어오는 사태를 어찌 감당해야 하겠는지요. 밀려드는 폭포수에 놀라서 500미터 높은 사찰까지 피신한 소들을 주인이 다시 데려갔습니다. 사찰 경내에 와서는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으면서 평온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스나미를 피해서 산으로 내달리는 코끼리처럼 폭우로 밀려드는 물을 피해서 산 중턱에까지 달려온 소의 사례가 연관성이 있어보입니다. 동물에게도 자연재해를 피하는 지혜가 있다는 것이겠지요. 인간은 동물만큼 감각이 빠르지 않아서 언제 큰 비가 올지, 산비탈 흙과 나무가 미끄러져서 민가 건물과 농경지를 덮칠지를 모르지만 그 전조상황을 캐취하는 동물이 있습니다. 개미가 이사를 가면 비가오는 징조이고 개가 짖으면 산사태 우려가 있다는 것이지요. 땅속의 흙과 돌과 물의 움직임에서 들려오는 소리나 진동이나 기타 제6의 감각으로 느끼는 바가 있다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