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청과 경기도의회의 언론담당관, 그리고 남양주시청, 오산시청, 동두천시청에서 부시장으로 근무한 이강석 전 경기테크노파크원장이 언론 기고문 중 100개를 모아 편집한 본인의 세 번째 책 ‘보리차 냄새와 옥수수 향기’를 2020년 출간한 바 있다.
그는 경기도에서 42년간 재직한 공직자로 공보부서에서 11년 6개월간 근무하면서 언론과 인연을 맺었고 도청 균형발전기획실장,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으로 근무하면서 꾸준히 언론에 기고했다.
또한 경기도테크노파크 원장으로 공직을 마감하면서 ‘언론사의 도움을 받은 바 크다’면서 신문사에 퇴임 인사를 다녀간 친 언론공무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임인사는 많이 오지만 퇴직자가 언론사를 방문한 예는 드물기 때문이다.
뉴스폼에 게재하는 '이강석의 세상만사'는 책 '보리차 냄새와 옥수수 향기'를 토대로 스마트 시대를 사는 요즘 사람들에게 스토리텔링을 통한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코너다.
세상사에 급한 일과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일이 있습니다. 호떡집에 불난 듯 하다는 말은 좁은 공간에서 발생한 화재의 경우 어찌할 바가 없다는 의미로서 불을 끄려하기 보다는 주변에 번지지 않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할 것입니다. 건물에서 추락한 환자는 급하게 일으키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라 그 자세에서 氣道(기도)를 확보하고 안정을 취하는 일이 중요할 것입니다. 집에 도착한 가족을 맞이하는 것은 급한 일이 아니라 반가운 일입니다. 아파트 현관의 문의 자물쇠를 풀어주는 것으로 충분할 것인데 문을 열어주는 바람에 아들이 아빠로부터 야단을 맞는 미안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물쇠를 풀고 기다리면 문열고 들어올 것인데 말입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문을 열어주었지만 '과공은 결례'에 해당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서두를수록 좋은 일, 반드시 서둘러야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초가집에 불이 나면 최대한 빨리 불을 꺼야 합니다. 교통사고가 나면 최우선적으로 환자를 구출하고 119를 불러야 합니다. 환자를 태운 구급차는 최대한 빠른 시간안에 병원 응급실에 가야 합니다. 뉴스에서 이른바 '모세의 기적'이라는 기사를 봅니다. 엠블런스나 경찰차가 경음을 울리며 달리자 앞선 차들이 길을
1988년에 워드프로세서를 처음 만났습니다. 무겁고 두꺼운 본체, 텔레비전 크기의 모니터, 그리고 타자기를 닮은 키보드가 왔습니다. 각각의 전원을 연결하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보이는 기계들입니다. 그 기기를 조작하면 A4용지에 검은색 글씨가 인쇄되어 나옵니다. 공무원을 하면서 11년 만(1977~1988)에 만난 첨단장비는 매일아침 만나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선은 아침에 조간신문 스크랩을 마치면 멋지게 인쇄한 표지를 올려서 비서실에 보냈습니다. 오전12시 정각이 되면 라디오 뉴스의 핵심내용을 A4 1매로 정리하여 비서실에 보냈습니다. 사실 오늘 하루의 국정은 정오 뉴스에 압축되기 때문입니다. 오후에는 각 부서의 홍보자료를 받아 기사문 형식으로 구성하여 워딩하였습니다. 출력하여 발간한 후 내일 아침 9시경에 언론인에게 배부할 예정자료입니다. 글씨를 잘 쓰면 인사팀으로 가던 시절이었습니다만 악필로 인해 다른 부서로 발령되고 승진하여 공보실에 왔습니다. 글씨는 못 쓰지만 글짓기는 조금 했다는 고등학교 시절의 문예활동이 인생의 큰 방향을 잡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글쓰기는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파트너인 줄 나중에 알았습니다. 좀더 노력하여
1984년 공무원 8급으로 근무하면서 인사계에 갈뻔 했지만 최종 점검에서 '악필'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인사계 차석이 "아이는 심부름 잘하게 생겼는데 글씨는 부족하다"며 다른 분을 선택하였습니다. 새마을과 서무담당으로 근무를 시작한지 3주후에 당시 인사계로 추천해 주신 고마우신 선배님으로부터 인사계 낙방사유를 듣고 정신을 차려서 타자학원에 등록했습니다. 중고 여학생들이 소나기에 우박을 보탠듯이 우르르쿵쿵 타자를 치는 치열한 삶의 현장인 타자학원을 2달 정도 다녔습니다. 타자 선생님이 손가락을 독수리의 부리처럼 세우고 하나치고 둘치고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무실의 타자기를 쓰다가 아예 개인 타자기를 구매하여 책상위에 놓고 자신의 업무는 물론 주변 선배들의 협조전이나 시군에 보내는 공문 시행문도 타자했습니다. 청타용지에 쳐서 발간실에 가져가면 당시 36시군에 보내는 공문서도 인쇄가능했습니다. 지금은 31시군에 공문을 일일이 보내는 것이 아니라 결재순간에 미리 정해진 코스를 타고 문서가 전자결재 시스템을 타고 시청으로 군청으로, 다른 관련기관으로 뛰어가서 접수를 기다립니다만 당시에는 공문 결재받는 일도 큰일이지만 공문서를 보내는
1998년 동두천시청에 근무할 당시 휴가를 받아 집에서 다음날 일정을 논의하는 저녁시간에 평소 동사무소 업무에 신경을 많이 써 주시던 관내 사장님께서 전화를 주셨지요. 비가 많이 오고 있고 피해가 발생할 염려가 되는 상황이니 동장님이 휴가중이어도 사무실에 나오는 것이 좋겠소. 시청에 수십년 출입하신 사장님이시고 공무원의 기본을 참으로 깊이있게 아시는 분이기에 지도편달의 전화를 하신 것이지요. 곧바로 차를 몰아 내달렸고 의정부를 지나 양주에 이를 즈음 정말로 비가 참으로 많이 온다 했습니다. 지금 양주시청 신청사 인근을 지날 때에는 중형 차 크레도스(20세, 1996~2016)가 움찔하고 흔들림을 느낄 정도의 황토물이 흘렀습니다. 그래도 동두천시 경계에 이르니 경찰관이 진입하지 말라고 교통 통제를 합니다. 밤 12:30인데 가지 말라면 이 폭우속에서 그냥 선채로 비를 맞으란 말씀인지요. 교통통제도 대안을 가지고 막아야 합니다. 쥐를 몰아도 도망칠 곳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쟁에서 배수의 진을 치기도 합니다만 늘 우리는 퇴로를 생각하면서 작전을 짜는 것 아닐런지요. 그리하여 좌측 강변우회도로를 타고 동사무소로 들어갔습니다. 차를 몰아 가는 길에 번
가뭄 끝에 폭우가 내리는 아침입니다. 나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 한다고 합니다. 효교육 강사님 강의내용 중에 요즘 아이들은 엄마를 위해 공부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맘에 안 들면, 사달라는 핸드폰 새 모델을 사주지 않으면 "나 공부 안해"라고 버틴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엄마를 위해 공부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서, 학생이기에 누군가에게 "나 안 해, 나 싫어!!!"라고 말할 수 있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살아가면서 그 누구에게도 "나 싫어!!!:"라고 말해본 기억이 없습니다. 주변에서 모두가 일하라고 합니다. 어느 상황에서도 싫다고 말해본 기억이 없습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일을 부탁한 기억도 적고 주변의 누구에게 나는 지금 이 일이 싫다고 한 일도 별로 없을듯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東西古今으로 요구를 하고 지적을 하는 사람들이 한가득입니다. 언젠가는 한 두번이라도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을 술에 취하면 아마도 실현을 하는가 봅니다. 평소의 마음속 기대감을 술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혹시 술의 힘이거나 음주의 핑게로 어리광을 부려보는 것은 아닐런지요. 혹시 이 시대 젊은 직장인
1968년 초등학교 3학년 방학을 맞아 10살 인생중 처음으로 자동차가 달리고 전기불이 있는 수원에 왔습니다. 2층, 5층 건물이 즐비한 북수동은 성안이어서 밭이 없었고 장안문 밖 북쪽에 자리한 영화동 배추밭에서 꿀벌을 잡았습니다. 흰색 파꽃위에서 꿀을 따는 꿀벌을 고무신 안에 잡아넣고 대보름날 불 깡통 돌리듯 7바퀴 정도 휘두른 후 바닥에 팽개치면 정신을 잃은 벌이 튕겨져 나와 잠시 한쪽으로 뱅뱅 돌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 후 무턱대고 어디론가 날아서 도망치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했습니다. 그 밭에 건물이 들어서고 도로가 자리를 잡아 깔끔한 도시로 변모한 요즈음 영화동 주변의 순대국집, 만두집, 삼겹살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50년전 어린 시절을 추억하곤 합니다. 지금 영화동 사무소 언저리쯤입니다. 가을날 오후에 번지는 따스하고 아련한 추억의 무대가 보이는 듯합니다. 이제 보니 영화동은 수원화성을 기준으로 성 밖입니다. 장안문을 기준으로 성안과 성밖이 구분되고 있습니다. 조선 성곽문 중 가장 크고 제일 멋진 장안문이 위용을 자랑하며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만 6.25 전쟁당시에 인민군의 소련제 탱크 2대가 장안문 안에 숨겨졌다는 정보를 입수한 UN군 지휘부가
우리의 업무용 사무실에서 없어져야 할 것으로 권위주의와 게으름과 불통이 지적되고 있습니다만 또 하나 실생활에서 버려야 할 것은 쓰레기통과 종이컵과 플라스틱 음료용기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쓰레기통은 작은 비닐봉지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사무실 책상 옆에, 음료수대에 비닐 봉투를 매달아 두고 발생하는 쓰레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휴지나 연필을 깍은 작은 것들을 버리면 됩니다. 이면지나 박스 종이는 종이 재활용장에 정리하면 됩니다. 다음으로 생수통 옆에서 차를 타 마시는 경우 발생하는 잘잘한 소품형 쓰레기도 역시 그 옆에 매달아둔 비닐 봉투에 넣도록 하고 일정량이 차면 돌돌 말아서 복도의 공동 쓰레기통에 배출하면 됩니다. 내가 버린 쓰레기를 사무실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치우고 그것을 모아서 다시 복도의 대형 쓰레기통에 버리는 다단계에서 한단계를 줄이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줄이거나 절약해야 할 용품중 하나가 종이컵입니다. 일반형의 작은 것도 한번 쓰고 버릴 때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 더 큰 커피용 종이컵은 아깝다는 생각을 넘어 이렇게 자원을 낭비해도 되는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잘 씻어서 재활용하는 방안이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대형 쓰레기봉투에 마구
동학사 입구에서 만난 나무들은 모두 돌과의 사랑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 돌 하나에 도대체 몇 그루의 나무들이 대를 이어 살아왔을까요. 그 나무의 조상을 따라 올라가면 이산이 아니라 건너편 산에서 출발한 나무 가문의 자손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에게 가문이 있다면 나무에게도 木門(목문)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 돌 속의 진액이 나무를 통해 줄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을까요. 혹시 저 돌들은 나무가 있어 제자리를 지키고 저 나무는 돌 틈에서만 생명이 유지되는 특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돌을 부여잡은 나무 모두는 왕성한 생명력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돌이 없는 나무는 웃자라거나 못자라서 고사하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지금 자리한 그곳이 최고의 명당이고 살아가기 딱 좋은 적지 일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가장 편안한 자기합리화라 해도 말입니다.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이 나무들은 돌 틈을 보금자리로 시작하였으므로 다른 곳에서 뿌리를 내렸더라면 저처럼 거목으로 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나무가 거름이 많다고 크게 자라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인간에게 밥을 많이 먹인다고 책을 많이 사준다고
이미 한번 언급한 이야기이지만 이쯤에서 한번 더 말씀드립니다. 그만큼 인생의 과정에서 우리의 좌우명을 세우는데 도움이 된다는 나름의 생각이 있기에 활자를 쓰고 종이를 할애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흑인 청년들이 강을 건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검은 색 돌덩이를 하나씩 가슴에 안았습니다. 강을 건너서면서 이 돌을 한곳에 모아 두고는 자신들의 직장을 향해 걸어갑니다. 저녁에 다시 강가에 온 청년들은 또다시 검은 돌을 하나씩 가슴에 안고 강을 건너편 집으로 돌아갑니다. 강을 건너면 가슴에 품었던 돌은 또다시 그 자리에 두고 말입니다. 종교활동일까요? 헬스클럽 대용일까요? 이 돌의 용도는 생명을 지키는데 쓰인답니다. 흑인 청년들이 강을 건널때 가슴에 안고가는 돌은 무게가 조금씩 다르다고 합니다. 볼링선수들이 자신의 체중이나 체력에 맞는 공을 사용하듯이 흑인청년들의 돌은 자신의 체중에 맞는 것을 고른다고 합니다. 설명이 조금 필요합니다. 이미 눈치를 채신 분도 게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돌은 흑인 청년의 생명돌입니다. 이들이 직장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할 강은 깊고 물살이 쎄기 때문에 맨몸으로 건너는 경우 물살에 밀려 떠내려갈 수 있답니다. 물살에 버티기 위
굽은 소나무가 마을을 지킨다는 내용의 지방선거 홍보물이 보입니다. 외지에 나가 자신의 영달을 이룩하고 다시 고향에 돌아와 선거직에 나서는 이를 거부하는 의사가 다분히 내포된 말이라고 봅니다. 자신은 어려서부터 지금 나이 50대 중반까지 이렇게 마을을 지키며 살았음을 강조하는 선거 전략입니다. 반론은 목재론입니다. 곧은 나무는 목수들의 눈에 들어 곧 벌채되고 한옥의 목재가 되어 이미 집을 짓는데 기여하였다는 말입니다. 아니면 외지에 나가 큰일 많이 하고 이제 다시 고향에 돌아와 일꾼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아무려면 어떠합니까. 동네 굽은 소나무이든 외지에 다녀온 기둥 나무이든 모두가 마을을 위해 이 한 몸 열심히 봉사하며 일하겠다는 것인데요. 부락 어르신들의 말씀을 시청에 전하고 시정을 이끌고 도정에 우리의 주장을 반영하겠다는 것인데요. 시의원, 도의원, 시장이 모두 봉사하겠다는 자리입니다. 얼마전부터 유급제가 되었지만, 과거 시의원과 도의원은 명예직으로 한 번 의회가면 그 당시 돈 3만원 정도를 여비로 받았을 뿐입니다. 요즘에는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유급제가 되었고 그 금액도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결정하는데요 금액도 높은 편입니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