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언론인·독자에게 추천하는 글
[ 어라! 이 친구 뭐지? ]
관선기자라는 닉네임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공보실에서 홍보를 담당하는 공직자를 두고 출입기자들이 불러주는 별칭이지요.
그러나 모두가 별칭으로 불리워지진 않습니다.
기자보다도 뛰어난 필력에 정무적인 감각이 있어야 얻어지는 별칭입니다. <중략>
9급 말단 공무원으로 시작해 1급 관리관으로 명예퇴직하는 전설로 남게 된 것도 홍보업무를 하면서 얻는 역량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연배는 아래지만 홍보업무를 함께 했던 그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존경했습니다. <중략> 그의 소중한 경험이 후배공직자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공직사회를 이해하는 길라잡이가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시인 홍승표(전 용인부시장/전 경기관광공사 사장)
기자들의 선후배는 나이보다 학교보다 언론에 입문한 연식을 기준으로 합니다. 입직이라고 합니다. 언론인 간 선후배는 참으로 중요한 位階(위계)로서 군대의 계급 이상으로 그 위력이 강합니다. 언론인은 편집국장조차 "先輩(선배)"라고 부릅니다. 만약에 국장이나 부국장에게 '선배'하지 않고 국장님이라 부른다면 별로 존경하지 않는다고 보면 맞습니다. 특히 술을 마시면서 취기가 오르면 자신들의 내부 선배는 물론 동석한 공무원이나 다른 기관 부서장에게도 "선배, 선배"하면서 이런저런 고충을 이야기 합니다. 사실 기자만큼 고충이 큰 직업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밖에서 보면 기자는 기사를 쓰면 쓰고 말면 마는 것 같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아침, 저녁으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사건이 없다고 신문 3면이 백지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큰 사건이 많다고 해서 지면이 늘지도 않습니다. 지면이 잠시 늘어나는 경우라면 대부분 창간 기념일 일 것입니다. 신문사 편집국은 기사의 우선순위를 정해서 면별로 기사를 채우고 기사가 부족하면 사진을 늘리고 기사가 넘치면 사진을 조금 줄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기사 몇 개를 버리면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
1988년 겨울 이야기입니다. 중앙사 K기자는 100자 원고지에 살살 내려쓴 후 팩스 보내고 데스크에 전화하면 끝입니다. 그날 송고해야 할 기사를 난로가에서, 소파에서 머리속으로만 구상한 후 이제다 싶으면 자리에 앉아 플러스 펜으로 초서처럼 내려쓴 후 다시 읽어보지도 않고 팩스에 밀어 넣습니다. 잠시후 본사 지방부에 전화를 해서 도착여부만 확인하면 끝입니다. 생각 2시간 기사작성 3분, 송고 2분이면 기사는 마무리됩니다. 다른 중앙사 L기자는 원고지 200자에 오전시간을 다 쓰십니다. 아침 10시에 보도자료를 배포하면 앞으로 자신에게는 8시반에 미리 달라는 주문을 하면서 기사작성에 들어갑니다. 우선 제공된 보도자료에 검정색으로 수정 가필한 후 읽어봅니다. 다시 100자 원고지에 옮겨적고 붉은색으로 가필한 후 청색으로 고치고 검정색으로 추가합니다. 원고지 위에 교통지도, 도로망도가 그려진듯 복잡하고 글씨도 둥글둥글합니다. 그래서 늘 바쁘신 L기자님은 점심시간 맞추기도 어렵습니다. 당시에는 잘나가는 석간신문이었으므로 오후 1시경 지방판이 마감됩니다. 점심을 제때에 맞추지 못하고 늘 허덕허덕 입니다. 수차례 수정과 가필을 거듭한 끝에 또다시 정서한 원고에 수정을
공무원#기자@주법조례.com 신입 언론인, 초임 공무원이 현업에서 가장 어려워하는 일이 회식입니다. 人口(인구)에 膾炙(회자)된다는 말은 회와 구운 고기라는 뜻으로, 칭찬을 받거나 비판을 받게 되는 경우 음식처럼 사람의 입에 자주 오르내림을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날음식과 익힌 음식을 먹는 입에 좋은 칭찬, 나쁜 비판이 오르내린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언론인이나 공무원은 물론 회사원들도 주변의 평가가 중요하고 그 직장에서의 미래를 좌우한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 저분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두고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고 합니다. 會食은 모여서 식사를 한다는 뜻입니다. [명사] 여러사람이 모여 함께 음식을 먹음 또는 그런 모임이라고 해석합니다. 이 부분을 길게 반복해서 말하는 이유는 직장생활에서 일하는 것 이상으로 회식이 중요하고 동료와 선후배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함께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상대방의 사회적 활동성에 대한 평가를 하게 됩니다. 그런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집니다. 건강을 위해서는 익은 음식도 먹고 날음식과 야채등 다양한 것들을 고르게 섭취하는 것이 중요
지난 2016년 8월 3일에 영화 덕혜옹주가 개봉하였습니다. 남양주시청에 근무면서 숙소에서 사무실까지 아침에는 3.5km우회하며 걸어가고 퇴근길은 2.5km 지름길로 다녔습니다. 어두운 밤에 묘역주변 산길을 걷기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1년 동안 봄 여름 가을 겨울까지 걷고 또 걸어서 꼭 366일 근무기간 동안 280번 가까이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 출근길에서 매번 만나는 분이 덕혜옹주였습니다. 1912년에 고종황제의 고명딸 옹주로 태어나 1989년에 돌아가셨습니다. 해방 후 한참이 지나 1962년에야 환국하여 창덕궁 낙선재에 사셨습니다. 어린 나이에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일본에 끌려갔습니다. 결혼과 이혼, 딸을 잃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이곳 남양주 묘역에 영면하셨습니다. 덕혜옹주의 일생이 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영화 '덕혜옹주'가 개봉된다는 사실을 알고 곧바로 움직였습니다. 간부 공무원들과 버스를 타고 영화관 인근에 가서 저녁으로 갈비탕을 먹고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다음날 오전 12시까지 소감문을 제출해 달라고 간부들에게 요청하여 그 내용을 정리한 후 감상문을 만들어 영화사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나시면 남양주시청과 덕혜옹주 묘역을 방문해 달라고
김희겸 재난안전실장님(전 경기도행정2부지사)께 드린 안전모가 언론에 많이 나왔습니다. 안전을 총괄하는 자리로 영전하신 부지사님께 북부청 간부들이 정성스럽게 비용을 捻出(염출=필요한 비용 따위를 어렵게 걷거나 모음)하여 만들어 드린 것이기에 '국민의 안전'을 지켜 달라는 소망과 함께 이임을 아쉬워하는 마음도 동시에 담겼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간부들이 만들어 드린 이 안전모에는 당시의 국민안전처 로고와 함께 경기도에서 함께하신 것을 기억해 달라는 의미로 경기도 로고(넥스트경기, 굳모닝경기, 세계속의 경기도)가 새겨졌습니다. 경기북부청에서 다양한 분야를 총괄하는 부지사로 일하셨지만 특히, 세월호 사고, 의정부 화재, 고양터미널 화재, 판교 환풍구 붕괴사고등 언론에 크게 보도된 사건마다 때로는 수개월간 사건이 마무리 될때까지 현장을 지켰습니다. 사건이 없을 때에는 재해안전 현장을 점검하는 발로 뛰는 "현장 부지사"의 役割(역할)을 수행한 결과를 보도한 기사를 안전모 여백에 담았습니다. 그래서 단단한 플라스틱에 움직이는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중앙지와 지방지에서 여러 문장을 길게 동원하여 다양하게 설명해 주고 나아가서
경기도행정역사관에 참 좋은 기억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언론에 보도하기 위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작은 관심이 큰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에 대해 자랑을 하고자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기도청 현판, 김영삼 대통령의 경기도의회 현판이 나란히 정리 보존 중입니다. 두 기관의 명칭이 새겨진 동판을 보존하는데 一翼을 담당하 였던 바 이에 대한 자랑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965년경에 서울 광화문에 소재한 경기도청 청사를 수원으로 이전 결정을 합니다. 처음에는 인천시로 간다 했습니다. 도청이 이전하려면 문방구, 설계사무소, 건설사, 식당 등 어느 정도 인프라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수원으로 경기도청이 이사를 온 1967년에 수원시내 택시가 10대 내외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정부의 관리들은 경기도 땅 서쪽방면으로 치우쳐 있는 인천시로 경기도청을 이전해야 한다는 현실적 판단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수원으로 경기도청이 와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당시 이병희 국회의원이 삭발투쟁을 벌이는 등 많은 인사들의 노력으로 수원 이전이 결정되었고 1967년에 지금의 팔달산 중턱에 경기도청 본관을 짓고 이사를 했습니다. 당시에 인천시로 경기도청을 이전했다면 또다시
홍보의 맥은 타이밍입니다. 이른바 계기 홍보가 중요합니다. 언론에서 기관장 취임 100일 기념 인터뷰를 하는 것도 홍보의 계기를 만들어 기사를 쓰면 '누이좋고 매부도 좋은 일'이기에 필요한 전략입니다. 경기도청에서 홍보의 진맥을 잘하는 '공보명인'으로 꼽는 선배가 있습니다. 공직에서 두 번을 전입자와 후임자로 만났습니다. 이 분이 신문에 기고한 내용과 타이밍을 소개하겠습니다. [아침단상] 경기도청 이전 후를 생각한다/ 경인일보 2019-11-06 제22면 경기도청은 수원화성이 있는 팔달산자락에 자리 잡고 지대도 높아 전망이 좋은 곳입니다. 잔디광장도 있고 산자락은 사시사철 다양한 색상과 다른 정취가 느껴지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감도는 최고의 환경을 갖추고 있지요. 벚꽃이 필 무렵에는 청사를 개방해 수십만의 도민이 찾는 명소이기도 합니다. 30년 넘는 세월을 그곳에 몸담아 일을 했지요. 그런 경기도청이 광교신도시로 이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도청은 67년 수원으로 이전해 근대유산으로 지정된 구관만 있다가 신관이 들어서고 지방자치시대가 다시 시작되면서 경기도 의회 건물이 들어서고 잇달아 식당이 있는 제2, 제3별관이 들어섰지요. <중략> 도청이 광교 신
1988년 당시 공보실에 근무하는 홍승표 선배가 구내식당에서 커피 한 잔 하자고 청합니다. 사금파리 흰 잔에 검붉은 커피 한 사발을 주는데 200원이었습니다. 5잔을 마셔도 1,000원에 해결되는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연봉이 1천만원을 넘지 못하였으니 당시 500원이면 최근 코미디에서 한때 인기를 누린 '궁금하면 500원'보다는 더 비싼 돈이었습니다. 3명이 앉아서 3잔을 마시며 나눈 이야기는 공보실에 와서 일해보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제안에서 가장 의미깊은 말은 고등학교 3년동안 문예반 활동을 한 것이 1순위요. 두 번째는 전임 세정과 보다는 자율적인 분위기에서 일한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사실 지방행정주사보 7급에 승진하여 세정과에 가니 매일매일 하는 일이 전자계산기 두드리기였습니다. 36개 시·군(현 31개 시·군)의 세외수입 보고서, 하천점용료 부담금, 그리고 본청 각 부서의 세입보고서를 집계하여 안전행정부에 전화로 불러주고 다음날 보고서를 제출하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공무원 7급에 대한 기대가 서서히 식어갈 즈음인데 아주 샤프한 제안을 받은 것입니다. 더구나 세정과 근무기간도 2년이 흘렀으니 이즈음에 부서를 이동하는 것도 자연스럽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청 7급은 실무자이고 시청과 군청의 7급은 차석입니다. 도청 계장은 사무관이고 시청 계장, 구청 계장, 동사무소 사무장은 주사 6급입니다. 영화 7급공무원에서 정보기관에 근무하는 배우 김하늘과 남자 요원이 현장에서 충돌하는 내용이 참으로 재미있었습니다. 아마도 정보기관 직원은 7급 공채를 하는가 봅니다. 7급 공채도 있지만 지방자치단체의 경우 9급에서 시작한 공무원이 7급이 되기까지 8급을 거치게 되면 10년 이상 공무원 밥을 먹게 됩니다. 따라서 7급 공무원은 중견입니다. 공직의 기능과 역할, 파워, 단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고개를 숙여야 하는지 바람 강하게 부는 바다 근처 넓은 강가를 따라 자라는 갈대의 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동차 운전 중 충돌하는 순간에도 사고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고 헬기나 전투기를 주택가를 피해 산으로 몰아 추돌하는 살신성인의 조종사 이야기도 많이 접하게 됩니다. 7급 공무원은 언론과 충돌할때 어느 지점이 부드러운 재질인가를 잘 파악하고 있으므로 '적땅껏' 대응하다 안 되면 작전상 후퇴를 하여야 합니다. 戰史(전사)에 정말로 작전상 후퇴가 있다고 합니다. 행정에서도 정말 안 되는 일은 작전상 기권하거나
2008년 8월에 경기도의회 부의장, 당대표, 상임위원장, 재선 이상 의원 40여명을 모시고 공무원 8명이 묵호항을 거쳐 울릉도와 독도를 방문하여 일본의 중등교과서 해설서에 독도를 일본 땅이라 주장한 것을 규탄하는 '독도수호 결의대회'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런데 독도일정 방문에 있어서 이른바 '미스매칭'이 발생하였습니다. 도의회 의원단은 묵호항 1박, 울릉도 1박의 2박3일 일정을 잡았는데 여행사간 미스매칭으로 울릉도 2박으로 판단하여 금요일이 아닌 토요일 배표를 확보하였고 일행은 금요일에 다시 돌아오는 일정으로 알고 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도의회를 출발한 버스 2대에 도의원과 공무원이 탑승하였는데 1호차와 2호차에 공무원 4명씩 분승하기로 하였으나 1호차에 의원님이 다수 승차한 관계로 공무원은 저 혼자만 남게 되었고 공무원 7명은 2호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한참을 달리자 생수를 달라는 주문이 들어왔고 물병과 휴지 등 이런저런 소품을 나르는 저에게 부의장님께서 "직원들도 함께 나르지"하시는데 "공무원 7명이 의원님께 자리 내드리고 2호차에 탑승하였습니다"라고 답했다. 계획상으로는 4명씩 분승예정이었으나 의원님들께서 1호차를 선호하시므로 혼자 남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