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행정 지원제도는 어떤 것이 있나요? 정부는 적극행정 활성화를 위해 사전컨설팅, 적극행정 면책, 인사상 우대, 법률적 지원 등의 제도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사전컨설팅이란? 공무원이 규정이나 지침을 해석하는데 어려움을 겪어 적극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기 곤란한 경우, 해당 규정 지침의 해석 또는 업무처리방향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기관 내부적으로는 자체감사기구나 적극행정 지원위원회에서 사전컨설팅을 제공해 줍니다. 기관 외부적으로는 시·도 감사기구(시군구의 경우), 해당 업무를 관장하는 중앙행정기관 또는 감사원에서 사전컨설팅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전컨설팅의 효과를 보겠습니다. 사전컨설팅 의견대로 업무를 처리한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적극행정 면책기준을 충족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 결과 사전컨설팅대로 업무 수행시 담당공무원은 징계책임이 면제될 수 있습니다. 이때 특별한 사정이란 공무원과 대상 업무 사이에 사적인 이해관계가 있거나, 공무원이 사전컨설팅에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은 경우 등을 의미합니다. 근거규정은 지방공무원 적극행정 운영규정 제5조, 제10조가 있고 공공감사에관한 법률 시행령 제13조의2와 적극행정면책 등 감사소명제도의 운
적극행정 강사반 교육을 받았습니다. 지난해인 2019년 10월31일부터 11월1일까지 2일간 지방자치인력개발원에서 적극행정강사반 교육을 받았습니다. 교육에서 정부 부처의 적극행정 지침과 방향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2020년 초부터 전국 시도, 시군구에 강사로 초빙되어서 적극행정을 널리 알리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연초 코로나19의 상황에 들어서면서 행정기관이 모두 방역과 관리에 행정력을 집중하게 되면서 초청 강사의 꿈은 잠시 접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서울에 소재한 홍보기획사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전남 무안군에서 적극행정 강사의 동영상 강의를 제작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무실이 소재한 서울시부터 연락을 하였는데 몇 번의 전화를 거쳐서 드디어 기회를 잡게 된 것입니다. 앞서 전화를 건 강사들은 본인이 고사하거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는 전화를 즉시 받았고 그 내용을 듣자마자 여러 곳에서 강의 경험이 있다면서 적극적으로 응대했습니다. 그리하여 준비하고 있던 적극행정 강의자료를 다시한번 정리하고 PPT를 편집하고 스스로 적극행정을 하였다고 자부하는 몇가지를 추가로 넣은 후 60분짜리 동영상 촬영 강
1970년에 초등학교를 마치고 동창생 전원이 비봉중학교로 단체 입학을 하게 됩니다. 무시험 입학이어서 초등학교 졸업장 들고 곧바로 비봉중학교 1학년이 되었습니다. 당시 서울에서는 학군제라 해서 무시험 뺑뺑이라는 입학 제도로 진행되었습니다. 비봉중학교에 가서 유도를 배웠습니다. 비봉중고 설립자 홍건표 교장선생님은 어려서 상경하여 사업에 성공하고 힘든시절을 버티게 해 준 유도를 통해 고향의 후배들을 잘 키우겠다는 학교 운영의 방침을 곧게 세우신 분입니다. 보통 실력으로는 5단에 이르는 유도의 승단인데 명예 8단에 이른 분입니다. 유도에서 명예8단이란 실력 5단 이후에 유도에 기여한 바에 따라 명예의 단을 올린다고 중학교 2학년쯤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장석표 유도 선생님은 검은 띠 5단이었고 명예 8단의 홍건표 교장선생님의 유도복 띠에는 붉은 색과 청색, 흰색이 무지개떡처럼 연결된 멋진 디자인이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장석표 선생님과 홍건표 교장선생님이 품새 대련을 시범으로 보이시는데 실제로 조르기를 하면 선생님이 캑캑 하면서 숨이 막히는 고통을 견디는 모습이 안스러웠습니다. 2학년 어느 날에 장인권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몬트리올 올림픽 메달리스트라 했습니다. 서구
선친이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지금 함께 사시는 부모님중 아비부입니다. 선친은 돌아가신 아버지 입니다. 다른 분의 아버지를 춘부장이라 합니다. 椿府丈(춘부장)은 상대방의 아버지를 높여 부를 때 쓰던 말입니다. 춘은 대춘이라는 상상속의 나무이고 이 나무가 8천년을 봄으로 삼고 다시 8천년을 가을로 삼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대춘의 1년은 3만2천년입다. 춘자에는 오래 살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았고 부장이란 집안의 큰 어른이란 뜻입니다. 1971년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에서 선친이 되신 것인가요. 오전에 수원사는 큰형이 비봉면 자안리 집에와서 어머니를 모시고 수원으로 갔습니다. 그날 밤에 누군가를 통해 전갈이 왔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시골에 닿은 것입니다. 전화가 없고 전기도 없던 시절이라 누군가가 인편으로 소식을 전하였고 할아버지, 집안 어른과 함께 비봉까지 5km를 걸어가서 수원가는 버스를 타고 성빈센트병원에 도착했습니다. 병원 어디엔가에 아버지가 계신데 만날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엉엉 우시고 큰형은 인상을 쓰고 저쪽 구석에 앉아 있습니다. 동네 어른들이 바쁘게 움직입니다. 다음날 아침에 어른들이 냉동고
중학교 3학년입니다. 1973년은 비봉중학교 3년차 다닌 시골 학생으로서 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나이입니다. 당시 한준배 국어선생님, 한문선 국어 선생님이 문학강의를 하시면 중2, 중3 시골소년은 그 문학의 길에 들어서려다 풀길로 가고 문학의 개울가로 가다가 실개천으로 방향을 틀기도 합니다. 그래서 문학소년의 가슴속에는 중학교 교사의 꿈이 자리를 잡습니다. 중학생 때 들은 문학적 이야기로는 큰 강은 폭이 넓고 높은 산은 골이 깊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큰 강과 높은 산자락의 소년소녀들이 문인이 되고 소설가가 된다 했습니다. 그 넓은 들판과 산과 하늘을 보면서 상상의 무대를 더 넓고 크게 마련한다는 말입니다. 작은 공간에서 큰 이야기를 꾸며내기는 어렵다 생각합니다. 넓은 공간에서 시작한 어떤 이야기 꾸미기가 비록 이런저련 여건이 부족하다 해도 최소의 결과가 결국에 크게 나타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1학기는 다리 골절로 집에서 지내고 여름방학 이후에 고교 진학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비봉고등학교 진학을 권유하시는 교무주임 선생님의 학교 발전 방침으로 인해 10명 정도 학생들이 마지막날까지 학교 교실에서 잠자면서 농성 비슷한 상황을 펼치게 되고 결국 마지막날 원서가
비봉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렵게 힘들게 수성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시골 중학교를 나와서 도시 수원의 공립 고등학교에 들어간 것은 약간의 모험이었습니다. 비봉중학교에서 6명이 진학했습니다. 지금 수원에 송죽동은 과거 솔대라 불렀습니다. 소나무와 대나무가 많아서 솔대라 했으므로 한자 그대로 松竹洞(송죽동)이라 작명했습니다. 율전동은 밤밭입이다. 밤나무가 많은 곳이라 해서 밤의 밭, 밤밭이 된 것입니다. 일본식, 왜식 작명의 흔적이 보이기도 합니다. 밤밭, 송죽동에 이모님이 사시고 사촌형님, 형수님은 교사를 하셨습니다. 이모님 덕분에 3년동안 불편없이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이모부 돌아가셨을때 상가에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종사촌들이 고등학교 3년동안 이모부와 함께 했으니 펑펑 울만도 하다 했습니다. 2012년에 이모님이 돌아가셨을때는 아주대 병원에 이들동안 상근하고 장지에 갔습니다. 이모부와 나란히 잘 모시는데 동참하고 걸어내려와 점심을 먹었습니다. 이모님 돌아가시기 전에 노인 요양원에 갔었습니다. 나이를 들면 그런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교회 열심히 다시시던 '한권사'님은 하느님 앞으로 평온하게 가셨습니다. 요즘 어머니 모습에서 한권사님의 그
1976년 10월 8일에 수성고등학교 3학년 문예반 학생으로 경희대학교 전국 고교생 백일장대회에 갔습니다. 그리고 '코'라는 과제를 받고 원고지 10장을 적어내고 4등상을 받았습니다. 당시 2등까지는 무시험 1학기 장학생으로 경희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하는 특전이 있었지만 참방 4등으로 상장과 한자사전을 상품으로 받았습니다. 경기도 안성출신 조병화 선생님을 직접 만나는 영광도 얻었습니다. 제출한 글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는데 심사위원들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제목을 듣는 순간 생각한 문장을 적어냈습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합니다. 창의력보다는 순간의 순수한 생각을 주제로 삼았던 기억이 납니다. 코는 후각으로서 처음에는 확실하게 냄새를 맏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마취되어 냄새를 모른다는 점을 압니다. 그래서 시골 재래식 화장실에 가서 처음에는 냄새가 나서 조금 불편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후각이 마취되어 냄새가 사라진 것처럼 편안해 집니다. 그런데 코의 기능은 이처럼 냄새를 맏으면 되는데 다른 쪽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합니다. 어려서부터 나는 콧구멍이 뻥 뚫린 것이 유난히 표가 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사람들이 화장실에 가서 코를 아래로 자꾸 잡아
5급으로 들어와서 23년만에 5급이 되었다는 조크가 있었습니다. 1977년 당시에는 5급 공무원이라도 들어가라 했습니다. 5급을(9급), 5급갑(8급), 4급을(7급), 4급갑(6급=주사), 3급을(5급=사무관), 3급갑(4급=서기관), 2급을(부이사관=3급)로 비교됩니다. 그래서 9급 공무원에 들어왔습니다. 초기에는 대학교 국문과 재수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공무원에 집중하게 되고 피동적으로 끌려가면서 스스로의 주관 없이 시간과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한 그해 2월에 응시를 했고 1977년 2월17일에 경기도인사위원장 직인이 박힌 합격통지서를 받았습니다. 당시 응시지역은 화성군이고 도내 시군 전체의 공무원 채용을 경기도가 총괄 대행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해 1977년 5월에 5급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6년11월23일에 다시 5급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비봉면사무소에서 공직을 시작하였습니다. 아무도 일을 가르치지 않고 너도 지금 나만큼 공무원에 대해 안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냥 일의 앞뒤 설명없이 진행하라 합니다. 물어볼 선배가 사무실에 없습니다. 모두가 현장에 나갔고 부면장님이 전화기를 잡고 사무실을 지키면서 군청의 지시를 대기하고 있습니
1978년은 공무원 2년차로서 몇가지 스토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국문과를 나와서 중학교 교사를 하겠다는 꿈이 살아있었지만 현실은 아니었고 그래서 방송대 1학년에 입학하였구 9년동안 다녀서 5년제 학사과정을 마쳤습니다. 공무원 2년차에는 산업계의 다양한 업무를 했습니다. 달달달 외웠습니다. 축산, 양정, 상공, 수산, 잠업, 농정, 관정, 그리고 잡다한 일을 도와야 했습니다. 월 20일이 되면 월말 기준 보고서 독촉이 옵니다. 특히 축산업무에 월보가 많았습니다. 답리작 사료작물, 서강사료 생산실적을 보고하고 젖소 마릿수, 육우와 한우 통계자료를 제출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숫자를 대한민국 정부의 농림수산부 통계로 쓰면 안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도, 전작 업무도 흔들림이 보였습니다. 수도는 수돗물 나오는 배관이 아니라 벼농사이고 육도는 밭농사입니다. 이는 차석 업무입니다. 군청 농산과는 논농사를 위해 존재하고 읍면은 농사짓는 현장 사무실입니다. 가뭄이 오면 안보적 차원에서 농사를 지어야 한다 했습니다. 그래서 통일벼를 심어야 했고 노풍은 크게 실패했습니다. 산업계장님이 20세 젊은 직원 둘을 데리고 시골마을에 갔습니다. 그리고
1978년에 비봉면사무소에서 양정담당을 하였습니다. 양정이란 추곡 쌀과 하곡 보리를 담당하는 업무입니다. 추곡수매는 정부가 농민들이 생산한 벼를 매입하여 정부양곡으로 비축하는 일입니다. 하곡수매는 보리를 사들이는 것입니다. 보리농사는 적으니 나오는 대로 사들이면 되는 것이지만 벼농사는 정부가 쌀을 사들였다가 쌀값이 오르면 비축 양곡을 시장에 내놓아서 적정 가격을 유지하도록 하는 정부 정책이 중요하게 작용하던 시절입니다. 이 양곡정책은 수년후 정부가 벼를 사들이지 않는 반대정책으로 바뀌었습니다만 1978년에서 1980년대 초까지는 공무원을 동원하여 벼를 사들이느라 힘들게 일했습니다. 제가 담당한 비봉면 상기리는 지금 봉담읍 상기리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습니다만 산촌마을이어서 추곡수매 목표량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부면장님이 양정담당 부락도 목표량에 미달하는가 지적을 하십니다. 그래서 수분 오버로 수매에 들어지 못한 벼 20가마를 제 월급으로 구매를 해서 비봉면 소재지 건조소에 위탁하여 13.5%이던가 수분 함량기준에 통과하도록 건조 포장하여 출하했습니다. 그런데 20가마니를 말리니 19가마로 줄었고 나중에 알았는데 20가마중 2가마 정도가 쭉정이를 담았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