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청과 경기도의회의 언론담당관, 그리고 남양주시청, 오산시청, 동두천시청에서 부시장으로 근무한 이강석 전 경기테크노파크원장이 언론 기고문 중 100개를 모아 편집한 본인의 세 번째 책 ‘보리차 냄새와 옥수수 향기’를 2020년 출간한 바 있다.
그는 경기도에서 42년간 재직한 공직자로 공보부서에서 11년 6개월간 근무하면서 언론과 인연을 맺었고 도청 균형발전기획실장,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으로 근무하면서 꾸준히 언론에 기고했다.
또한 경기도테크노파크 원장으로 공직을 마감하면서 ‘언론사의 도움을 받은 바 크다’면서 신문사에 퇴임 인사를 다녀간 친 언론공무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임인사는 많이 오지만 퇴직자가 언론사를 방문한 예는 드물기 때문이다.
뉴스폼에 게재하는 '이강석의 세상만사'는 책 '보리차 냄새와 옥수수 향기'를 토대로 스마트 시대를 사는 요즘 사람들에게 스토리텔링을 통한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코너다.
1981년 8월에 팔탄면사무소 근무중에 응시한 시험에 합격해서 경기도청으로 발령을 받아 농민교육원에 배정되었습니다. 농민교육원에서는 농기계교육과 새마을교육을 진행했습니다. 새마을교육계에서 외부강사를 모시는 업무를 했습니다. 당시 교육원에서는 1기에 200명 정도 새마을지도자를 대상으로하는 교육이 진행중이었습니다. 수원역까지 기차를 타고 오신 강사님을 승용차 조수석에 동승하여 사무실까지 모셔옵니다. 강사님이 타시도록 차량 문을 열고 잘 오르신 것을 확인한 후에 문을 닫는 순간에 과한 의전을 하다보니 손가락이 차문에 끼었습니다. 깊이 끼인 것은 아니고 그냥 틈새에 잠시 눌렸다가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손가락이 아프고 잠시 살펴보니 피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손수건으로 손가락을 감고 승용차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차는 출발했고 대략 10km를 달려서 사무실에 도착했습니다. 25분 정도 손가락을 부여잡고 도착해서 차문을 열어 내려드렸고, 마침 현관에서 대기중인 선임 주사님이 강사님을 안내하므로 일단 수행업무는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의무담당의 치료를 받았습니다. 큰 부상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어린 마음에 자신과 관련해서 수행원이 손가락을 다친 것을 아시면 2시간 강의에
선배를 만났는데 이른바 뇌졸증으로 큰 일을 당할 상황에서 이른바 골든타임에 병원진료를 받아서 회복했다 하십니다. 그래서 담배를 끊고 건강을 관리하는데 노력한다 하십니다. 잘 하신 일입니다. 나이들수록 건강이 소중해집니다. 재물, 재산은 내것이 아닙니다. 건강만이 자신의 것이고 자신만이 건강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장자말씀이든 법정스님이든 무소유, 가진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지니고 있는 것은 자신일뿐 집이나 땅이나 살림살이, 가재도구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재산이 많고 돈이 많아서 오히려 건강을 해친다는 소설이나 이야기가 많습니다. 유명한 영화에서 산 정상부근에 추락한 현장에 오른 형제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형제는 사람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설산 정상 비행기 추락현장에 올라갔는데 동생은 사람을 구해내고 형은 사망한 사람들의 돈과 보석을 모아서 산길을 내려옵니다. 동생은 아취형태의 얼음이 만든 다리를 먼저 기어서 내려온 후 부상자를 태운 썰매를 당겨서 구해냅니다. 하지만 형은 온몸에 보석과 돈을 지닌 채 그 얼음 아취 다리를 건너다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깊은 낭떠러지로 떨어집니다. 욕심을 낸 재물과 생명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숨쉬기, 심장 뛰기, 눈 깜빡, 그리고 절하기입니다. 그렇게 인생은 매일매일 아침을 맞이하면서 시작하고 저녁에 하루를 마무리하는 나날을 보내는 것입니다. 100년을 산다면 36,500일을 그렇게 하면 됩니다. 어려서는 못하고 나이 들어서도 못하는 일이니 대략 20,000일 정도를 그런 수행의 마음으로 살아가면 인생은 멋지게 구성되고 완성될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는 나이는 대략 12살로 봅니다. 그리고 노후에 5년정도 와병을 한다고 가정하고 12년을 90세에서 빼면 72년 정도를 주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으로서 자기 정신을 가지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어진 나날을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매일매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부모님, 조상님, 신이 내려주신 인생을 소중하고 쓰고 관리해야 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모든 자료를 관리하고 후대에 물려야 합니다. 그런데 시대가 많이 변해서 가족들이 사후에 이런 물품, 물건, 자료들을 잘 보관하기 어려운 2022년이고 100세인 2057년에는 더더욱 더 보존에 대한 인식이 흐려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서책들이 지금까지 서당이나 고
수개월 월급을 쪼개고 모아서 오토바이를 장만했습니다. 자전거로 시작한 공무원 생활이 동력장치로 그 장비를 업그레이드한 것이지만 추가비용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에도 젊은이들이 새 차를 사면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비용도 크거니와 주유, 엔진오일, 보험, 세차 등 기본적이거나 부가적인 비용이 추가됩니다. 여기에 더 큰 소비양태의 변화로 인해서 소비 수준이 높아지게 됩니다. 전에는 그냥 갈비탕을 먹었는데 차가 움직이다보니 주차장이 넓고 편안한 식당을 찾게되고 그래서 점심 식사비가 12,000원이던 것이 2만원 이상으로 올라갑니다. 설렁탕, 해장국이 뚝불고기나 갈비정식으로 바꾸는 것이고 그래서 소비를 말하는 엥겔게수가 올라간다는 말입니다. 사실 1978년도에 오토바이를 운영해도 큰 비용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그 당시는 오일쇼크를 몰랐습니다. 그냥 동네 원동기 수리하는 아저씨가 비공식으로 판매하는 휘발유를 넣었습니다. 큰 소주병에 휘발유를 담아두었다가 면직원이나 농협직원이 오토바이를 타고가면 한 병, 두 병 넣어주고 얼마를 받습니다. 그리 비싼 금액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신 오토바이의 기동성은 뛰어났습니다. 부면장님은 49cc 오토바이를 타고 오로롱 거
2008년에 중앙지급 월간지에 자료로 제출한 글입니다. 실제로 일부가 실렸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부는 이미 실현 중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도청은 수원 팔달산에 있습니다. 하지만 경기도청 공무원들이 근무하는 청사는 보통 생각하시는 것보다 많습니다. 우선 소방공무원들은 도청직원입니다. 의정부에 경기도 제2청사가 있습니다. 제2청이 아니고 청사(廳舍)입니다. 즉 경기도청의 조직 중 가족여성정책실, 기획행정실, 경제농정국, 문화복지국, 도시환경국, 교통도로국, 제2소방재난본부 사무실이 의정부에 있는 것이지요. 팔당수질개선본부는 팔당호 주변에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입니다. 조선시대 도자기를 굽던 분원리 말입니다. 풍성한 나무가 우거진 축령산 휴양림 관리소, 물향기수목원 등 많은 기관이 도내 여러곳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2청 의정부 청사에 근무하는 간부들이 회의에 참석하거나 의회에 나가 도정을 설명하려 하면 아침에 사무실로 출근했다가 다시 버스를 타거나 승용차를 이용해 1청사인 수원으로 와야 합니다. 참 번거로운 일이지요. 물론 영상회의 시스템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대면하는 회의가 효율적이고 의미전달이 정확한 법
화성시 신규공무원 여러분 반갑습니다. 퇴직공무원 이강석입니다. 저의 고향은 우리 화성시 비봉면 자안리입니다. 태행산 자락에서 태어나 하늘과 산과 논밭을 보고 성장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후에 처음으로 비봉면 소재지를 다녀왔고 초등학교 3학년때 수원 영화동을 가 보았으며 6학년때 서울 성동구 금호동의 이모님댁에 가서 마침 치과의사를 하시는 이모부님으로부터 초등학교 3학년때 부러진 앞니를 무료로 끼워넣었습니다. 이후 비봉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마친 그해 1977년 2월에 여러분과 같이 9급 공무원 시험을 보았습니다. 당시에는 5급을류 공무원이라 했습니다. 현재의 8급은 5급갑, 7급은 4급을, 6급은 4급갑, 5급은 3급을, 4급은 3급갑입니다. 이후 지금처럼 공무원 급수가 9단계로 바뀌면서 5급 공무원 들어와서 25년만에 다시 5급 공무원이 되었다는 농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할 제목은 적극행정과 공직생활 길라잡이입니다. 길라잡이란 길을 인도하는 사람, 길앞잡이, 길나장이가 섞여서 이루어진 말이라고 합니다. 길나장이는 옛날에 수령이 외출할 때에 길을 인도하던 나장(관아에서 심부름 등을 맡아보는 사람)을 가리키던 말입니다. 최근에 종영된 드
우리가 다중장소라 할 수 있는 회의실이나 강의실, 강연장, 전철 안에서 실수로 방꾸를 뿡~~~하고 발사했다 해서 무슨 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소리를 들은 주변 사람들이 저 사람 가스가 찻구나, 조절이 안 되는구나 하는 정도의 생각을 하고 옅은 미소를 지을 것이고 10초 후에는 다 잊어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방구의 당사자는 그 순간의 쑥스러움이든 창피함이든 당황스러운 기억을 원하지도 않는데 평생 간직하거나 최소 수개월 머리속에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언론에 우리의 이야기가 나오면 당사자는 정말 방구 뿡~ 이상으로 평생의 기억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기사로 나온 것이라면 나이 80을 넘어도 자랑으로 남아서 어느 모임에서든 어찌해서라도 분위기를 바꿔서 지금 진행중이던 이야기를 자신의 자랑스러운 TV방송에 나온 이야기나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났었던 사실을 자랑스럽게 영웅담으로 풀어낼 것입니다. 반대로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는 방송이나 신문의 보도나 기사에 대해서는 유사한 사례만 보아도 머릿속에 그 당시의 아픈 기억이 떠오를 것입니다. 트라우마라고 합니다. 우리가 언론을 대하는데 있어서 지나치게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손해가 됩니다.
2015년 10월25일에 화성 제부도에 가족여행을 갔습니다. 제부도 섬 뒷편에 철봉과 나무로 테크를 만들어 여행객들이 재미있게 섬 뒷편을 산책할 수 있는 참 좋은 코스가 있습니다. 참으로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차분히 걸어가다가 파도에 씻겨나간 절벽 위에 힘겹게 매달린 소나무를 발견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무너지는 절벽에 늘어진 소나무라 생각했는데 거꾸로 매달린 세월이 2~3년은 되는 듯 보였습니다. 아래쪽 가지에 솔방울이 많이 달려있고 그 솔잎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른바 向日性(향일성)이라 해서 식물의 잎과 가지는 태양을 향한다는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늘어진 것이 아니고 몇 년 된듯한데 아주 싱싱하게 거꾸로 매달려 잘 자라고 있습니다. 붉은 바위틈에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화성시청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액자를 만들어 세우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소나무와 관광객이 서 있는 바다위 데크길은 20m정도 떨어져 있으니 그 중간 10m지점에 네모난 액자를 설치하면 좋겠습니다. 그 액자 테두리에 "생명스러운 소나무 화성시와 함께...."라든지 "화성시민 힘의 원천입니다"라든지 "힘내라 힘!!!" 등 격문을 적어보자 했
평창 올림픽 기념 2,000원 지폐가 8,000원에 판매된다고 하는데 큰 정성과 적극적인 노력이 없으므로 구매하지 못하였습니다. 지난번 문재인 대통령 취임 기념 우표도 우체국앞에 장사진을 치고 전량 매진, 소진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한국은행 최초의 기념주화가 3천만원을 호가한다고 하니 대단한 일입니다. 미국의 2달러의 소중함을 벤치마킹한 듯 지극히 서민적이고 전통시장에서만 볼 수 있을 것 같은 우리나라돈 2,000원짜리는 발매되어도 시중에 돌아다니지 않고 각각의 집안 장롱, 앨범, 수첩속에 곱게 간직될 것 같습니다. 소중한 것은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내보내지도 않는 것이 사람들의 고운 심성이니 말입니다. 아이들 어려서 20년전쯤에 500원주화 등 몇가지 기념화폐 동전을 사둔 기억이 있고 아이들에게 전해주었으므로 앞으로 30년 정도 잘 보관했다가 손자들에게 전해주면 가문의 작은 가보가 되거나 급할 때 팔아서 쌀이라도 사서 밥 해먹을 유산아닌 유산이 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솔직히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젊은 시절 1945년 전후에 누군가와 사업상, 개인 삶의 과정에서 편지를 많이 쓰시고 주고 받으셨다면, 그리고 그것을 자손들에게 곱게 관리하여 물려주셨다면 땅
청량산 청량사에 다녀왔다. 신라 문무왕3년(663)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경북 봉화군 명호면 북골리에 있다. 주소를 입력하고 목적지에 도착했으나 사찰이 보이지 않았다. 1982년에 경상북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바 등산객을 위한 주차장과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다. 주차장시설과 차량에 집중하다보니 왼쪽 가파른 길가에 세워진 청량사 입구라는 돌간판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청량사 입구를 지나 공원안으로 수백미터를 더 올라갔으나 사찰을 발견하지 못하고 다시 유턴하여 사찰의 일주문을 건립중인 하천부근까지 내려와서 다시 주소를 입력하고 목적지 부근에서 이리저리 청량사를 찾았다. 그리하여 글씨조차 잘 보이지 않는 청량사 입구 안내석을 발견했다. 차분하게 가파른 길을 올랐다. 신발속에서 발이 미끄러지는 느낌이 든다. 그만큼 비탈이 심하다. 차가운 초겨울 날씨로 숨이 가쁘다. 속도를 늦추고 걸었다. 대부분의 사찰이 산 중턱 이상의 자리에 있으니 청량사를 만나려면 구도자의 심정으로 차분하게 장시간 걸어야 할 것이라는 다짐을 했다. 실제로 거대한 바위를 오른편에 두고 오르고 돌고 다시 좌측으로 돌고 우측으로 걷기를 반복하다보니 돌탑이 보인다. 작업복을 입은 분이 비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