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언론인·독자에게 추천하는 글
[ 어라! 이 친구 뭐지? ]
관선기자라는 닉네임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공보실에서 홍보를 담당하는 공직자를 두고 출입기자들이 불러주는 별칭이지요.
그러나 모두가 별칭으로 불리워지진 않습니다.
기자보다도 뛰어난 필력에 정무적인 감각이 있어야 얻어지는 별칭입니다. <중략>
9급 말단 공무원으로 시작해 1급 관리관으로 명예퇴직하는 전설로 남게 된 것도 홍보업무를 하면서 얻는 역량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연배는 아래지만 홍보업무를 함께 했던 그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존경했습니다. <중략> 그의 소중한 경험이 후배공직자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공직사회를 이해하는 길라잡이가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시인 홍승표(전 용인부시장/전 경기관광공사 사장)
언급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언론사의 광고는 곧 생명과 같습니다. 신문사나 방송사가 광고 없이는 운영이 어렵습니다. 광고가 없으면 언론도 없습니다. 공영방송 KBS도 협찬이라는 형식의 사실상 광고가 있습니다. 신문사는 매일같이 수십건의 광고를 실어야 하는데 광고주는 신문사 광고국에 전화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광고가 잘되는 신문사 광고부장은 광고주를 피해다니고 잘 안되는 신문사 광고부장은 광고주를 따라 다닌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제품이 잘 팔리라고 광고를 싣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영업실적을 올리기 위해 광고를 내는 것인지가 모호한가 봅니다. 광고효과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번 광고가 얼마만큼 매출에 효과를 올렸는지를 평가하기는 참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언론사는 늘 자신의 독자와 시청자를 자랑하지만 광고주는 그만큼 인정하는 눈치가 아닌 듯 보입니다. 그래서 광고를 내는 광고주가 나서기 보다는 광고매체인 신문사가 광고에 앞장서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신문사에 광고를 내면 효과가 높다고 주장하십니다만 그것을 증명할 방법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앞서 말한 대로 광고효과가 그 신문사의 파워에 의한 것인가를 상호간에 증명할
1988년경 경기도내 모든 소방서는 도 민방위국 소방행정과(4급 과장)에서 종합관리하는 도의 기관이었습니다. 조직, 인사, 예산을 소방행정과에서 지원했습니다. 30년이 지난 2019년에는 1급 소방본부장에 3급 간부가 5~6명정도 되고 소방관 정원이 일반직 도청 공무원보다 많습니다. 소방관은 시군지역에 근무해도 경기도청 소속 공무원입니다. 현재 경기도내 소방서 근무 소방관은 8,900명이며 2019년에 911명을 추가 채용한다고 합니다. 119를 연상하게 하는 911명도 홍보전략이 가미된 듯 보입니다. 과거에는 119 불자동차라 해서 화재가 나면 싸이렌을 울리면서 달려가는 것이 소방서 기능의 전부라 생각했지만 요즘에는 그 분야가 확장되어서 모든 사건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가는 소방관이 되었습니다. 화재현장에 소방관이 달려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교통사고, 건물 붕괴, 수해, 한해, 산불 등 자연재해, 재난 등 모든 사건사고의 현장에 소방관이 출동합니다. 소방과 防護(방호)를 설명하는 참 좋은 강의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소방은 불이 났을때 달려가서 진화를 하는 것입니다. 반면 방호는 불이 나지 않도록 사전에 취약지를 점검하고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공보실이나 홍보실에 근무하신다면 이 글을 읽으시고 몇가지 고민을 해결하시고 마음 편안하게 술 한 잔 드시기 바랍니다. 혹시 운명적으로 어느날 홍보부서에 근무하게 된다면 그때가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고민 한 두가지를 해소하시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공보 공무원이 아니고 회사의 홍보실 직원이 아니어도 이책에 나오는 주법을 읽으시고 그동안 주석에서 고민한 3가지 정도의 갈등을 풀어내시기를 소망합니다. 여기에서 드리고자 하는 이야기는 공직근무 중에 만난 언론인과 그 현장에서의 기억과 느낌과 감동과 아픔을 적은 내용 입니다. 언론 전문가의 글이 아니고 언론 현장에서의 고민을 바탕으로 적어둔 글입니다. 현장에서 보고 어깨너머로 바라보면서 공무원이 힘들어 하는 언론, 언론인들이 불편해는 공무원에 대한 견해를 필기했습니다. 공감하지 못하시거나 경우에 따라 반대의 입장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문제점이 발견되는 경우 알려주시면 깊이 반성하고 더 고민하고 의논해서 대안을 찾아가겠습니다. 거대한 언론현장에서 다양한 경우의 수를 바탕으로 적어낸 글이니 정답은 아니고 경험담입니다. 하지만 언론의 한편만 바라보는 일반부서 공무원의 입장에서는 그 속의 치열함을 알기 어렵고,
대변인실에서 언론사 출입기자에게 보도자료를 배포하는 업무를 담당하던 1989년 어느 날입니다. 자료를 제공해 준 부서의 담당자가 전화를 해서 신문에 기사는 나지 않고 사진만 보인다고 항의인지 어필인지 애매하게 따지듯 물어왔습니다. 홍보의 전략으로는 행사전에 예고기사를 내고 행사하면 당일 기사를 올린 후 그 결과와 성과를 한번 더 기사화 하거나 언론사 간부의 컬럼이나 논설위원의 사설을 받으면 홍보의 단계상 금상첨화라 생각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부서의 행사는 중간단계인 사진만 나왔으니 담당자로서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 들었을 것입니다. 담담하게 답을 하였습니다. 제 실력으로는 신문 지면 반을 주어도 그 사진의 내용을 다 설명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기사 중에 으뜸은 사진이고 다음이 활자입니다. 교육을 받을때 視→聽→覺(시청각)의 역량에 대한 설명을 들은 기억이 있는데 첫째가 보고 이해함이고 다음으로 듣고 아는 일이며 마지막이 느끼는 것이라 합니다. 혹시 다음 기회에 신문지면 한 장을 생각하시고 그 사진을 묘사해 보시면 어떨까 상상해 봅니다. 부서 담당자의 어필에 대해서는 긴말을 피하기 위해 '제가 부족했다'고 얼버무렸지만 오늘날에도 신문 초벌에 사진이 올라가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차를 좋아해서 호를 다산(茶山)이라 했다. 그런데 다산은 한강을 의미하는 열수(洌水)라는 호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22세에 과거에 장원 합격했다. 혁신군주 정조(1752~1800)는 10살 동생뻘인 정약용을 중용했다. 다산은 정조를 보좌하면서 한강에 배 다리를 건설하고 1793년 31세 나이에 화성을 설계했다. 현재의 경기도청이 자리한 팔달산에 화성을 축성하는 공사를 총괄했다. 다산은 일생 저술에도 힘써 500권을 집필했다. 이중 ‘일표이서’라 불리는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를 통해 군주권의 절대성과 우월성을 내용으로 하는 왕권강화론을 제시했다고 한다. 1800년 승하하신 정조대왕, 1801년에 강진으로 귀양가 정치권에서 밀려난 다산=열수 정약용 암행어사. 두 분에게 10년 정도 왕과 신하로서의 역사 시간이 조금 더 주어졌다면 조선 후기와 현대에까지 크나큰 발전적 변화와 긍정적 혁신이 있었을 것이다. 다산의 글 중 일부를 소개한다. 병든 아내가 치마를 보내 천 리 밖에 그리워하는 마음을 부쳤는데 오랜 세월 홍색이 이미 바랜 것을 보니 서글피 노쇠했다는 생각이 드네. 잘라서 작은 서첩을 만들어 그나마 아들들을 타이르는
[스토리텔링] #새벽에 일어난 선비가 글씨를 쓰기 위해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더 일찍 잠에서 깬 새 한마리가 창틀 밖의 나뭇가지에 앉아있으므로 선비는 기분 좋게 새조자를 한획 그어보았습니다. 早鳥~~~~~! 일찍 일어난 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글씨에 힘이 빠지고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종이를 버리고 다시 새조자를 여러번 썼지만 결국 글쓰기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느 양반집 사랑채에서 하룻밤을 묶고 아침을 맞이하였는데 8폭 병풍 글씨중에 자신의 글씨가 표구되어 있습니다. 선비가 쓴 글인데 마음에 들지 않아 버렸던 것인데 그 글씨가 양반집 사랑채 8폭 병풍에 한자리를 떠커니 자리를 잡고 있으므로 신기하기도하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은 글씨였으므로 잠시 붓을 들어 새조자의 불화변 ,,,, 점 4개를 ''''로 힘을 주어서 가필을 하였습니다. 양반 어르신이 방에 들어와 병풍을 살피던 중 새조자가 변형된 것을 발견하고 선비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이 새조자가 참 의미있고 멋드러진 필체인데 이것을 누가 가필을 하였구려. 선비가 그리하였습니까? 이에 선비가 전후사정을 이야기 했습니다. 자신의 글씨인데 마음에 들지않아 버렸던 것이고 오늘
1988년 올림픽이 열린 해 상반기에는 지방신문이 경인일보 1개사였고 하반기에 경기일보, 기호일보, 인천일보가 창간되어 지방 4사 언론사 시대를 열었습니다. 초기에는 공직사회 모든 부서에 신문이 보급되지 못하였으므로 공보실의 신문 스크랩이 중요한 홍보매체로 활용되었습니다. 여기에다 중앙지의 1~2단 기사, KBS, MBC, SBS의 뉴스를 모니터링해서 신문 스크랩 앞에 편철하여 배부하였으므로 언론의 집대성이랄 수 있는 스크랩은 중요한 업무가 되었습니다. IT시대에는 신문기사를 인터넷 글로 복사하기도 하고 방송에 나온 내용을 화면으로 스크랩하기도 합니다만 1988년에는 신문기사는 칼로 오려내어 풀로 붙이고 방송기사는 글로 적어서 보고했습니다. 그리하여 아침 7시반에 9명이 출근하여 조간신문을 면별로 정독하고 경기도 기사가 나온 것을 칼로 오렸습니다. 스포츠면에도 가끔 경기라는 한글이 나와서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지방지, 중앙지, 방송 뉴스내용을 스크랩하는 직원의 재량권이 크다는 점입니다. 중앙지 신문을 다 정독해 보았지만 경기도 기사가 없으면 정부 기사중 행정 관련한 것이라도 하나 건져냅니다. 어느 날에는 도정기사가 많으므로 큰 기사
1988년에는 신문은 대부분 세로쓰기가 기본이었고 일부 가로쓰기가 병용되는 시기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세로쓰기는 비판기사이고 가로쓰기는 홍보기사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실제로 홍보기사 제목에는 비단 무늬가 들어갔고 비판이 실리는 경우 제목은 그냥 흑백의 흰글씨이거나 반대의 검은 글씨였습니다. 즉 가슴에 강하게 느껴지는 기사 제목은 검은글씨가 아니라 흰글씨를 부각시키는 배경의 검은색 면이었습니다. 신문에 도배를 하였다는 말은 바로 비판기사의 글씨가 흰색이고 나머지를 검은색으로 칠한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검은 페인트로 칠하듯 검은 종이를 벽에 붙이듯 도배를 하였다는 표현이 아주 실감나는 시절이었습니다. 사실 신문의 생명은 편집기술에서 태어납니다. 현장 취재기자의 원고는 제목없이 들어와 엄청난 크기의 글씨로 제목을 달고 새 생명을 얻어 지면에서 탄생의 고고한 목소리를 울립니다. 신문기사의 경중은 제목 작명의 기술에 의해 판단되고 좌우됩니다. 좋은 기사는 제목이 강하지 못합니다. 반면 비판기사의 제목은 날카롭고 무겁고 차갑습니다. 어쩌면 편집부 기자들은 같은 사안을 보고도 이렇게 상반된 생각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요. 흔히 말하듯 소주가 반병밖에 남지
출입기자나 특별히 언론인을 만나는 경우 우리 공무원은 늘 '先言後公'의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언론이 먼저요 공무원은 그 다음이라는 뜻으로서 일단 이 세상사 어디에나 적용될 말입니다. 즉, 모든 일에 언론이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고 공무원은 독자 또는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언론의 비판과 指導鞭撻(지도편달)을 따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언론에 항상 저자세를 취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공무원으로서 자신의 업무에 자신이 있다면 언론인과 당당하게 맞서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男性(남성)은 아버지이고 女性(여성)은 어머니이듯이 언론은 評價(평가)이고 행정은 執行(집행)입니다. 행정은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하고 인허가를 결정하여야 하는 아주 많은 가지 수의 일을 하여야 합니다. 반면 언론은 자신들이 하는 사업은 적은 편이고 늘 기사를 통해 행정을 평가하고 비판하고 공무원을 계도합니다. 그래서 언론인은 일종의 직업병이라는 말을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가 오면 짚신 장사 아들이 걱정이요 날씨가 청명 쾌청하면 나막신 장사아들 장사가 안 되니 걱정인 것은 부모마음이나 공무원 생각이나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언론인은 비오는 날 만난 아들이 나막신이냐 짚신이냐에
잘 아시는 바이지만 언론사 기자들 사이에서 편집국장을 '국장'이라 부르거나 아예 '선배'라고 호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합니다. 다시말해 부장님, 국장님, 차장님이라 하지 않고 선배라고 부른답니다. 그러니 편집국장에게 '국장님'이라고 호칭한다는 것은 선배로 모시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한 나라에 지도자가 있듯이 조직에는 리더가 있고 신문사에는 선배와 후배가 상존합니다. 그래서 조직은 개미굴 처럼 보이지만 일개미, 헌병개미, 초병개미, 왕개미가 있듯이 신문사 안에도 국장, 부국장, 부장, 차장, 기자가 있고 취재기자와 편집기자, 사진기자가 있는 것입니다. 정치부, 경제부, 국제부, 사회부, 제2사회부가 있어서 본사와 지사를 관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언론사에서 수십년 일하면서 항상 선후배의 존경과 사랑을 받기가 어려울 것인데 늘 존경을 받으며 일하고 맺고 끊음조차 정확하여 어느 시점에서 또 다른 사회로 나와 사막같은 광야에서 눈보라, 모래바람을 맞고 있는 언론인이 있습니다. 현역에서 존경받았듯이 퇴임 이후에도 선배로 멋진 언론인으로 추앙받는 이유를 최근에 알았습니다. 95세 모친을 떠나보내는 심경을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댓글이 그렇게 많이 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