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정겸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나는 전류의 흐름이 그치고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처럼 고독하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아버지가 가출했다

 

실종신고 석 달 만에

돌아온 것은 달랑 유서 한 장이었다

검은색 비닐 봉투 속

꼬깃꼬깃 접혀 있는 색 바랜 종이에는

농협 통장의 비밀번호와

 

'늘 바람과의 전쟁에서

겨우 살아 온 늙은 몸

손자에게 티비 채널권 빼앗기고

애완견에게 밥 먹는 순서마저 빼앗겼다'라고 적혀 있었다

 

 

 


정겸 시인

1957년 경기 화성출생(본명 정승렬), 2003년 시사사 등단, 시집 '푸른경전', '공무원', '궁평항', 공무원문예대전 시, 시조부문 행정안전부장관상, 경기시인상 수상, 현재 칼럼니스트와 한국경기시인협회이사로 활동


 

-시작메모-

 

낡은 리어카에 파지를 차곡차곡 싣고 힘겹게 언덕을 넘어가는 어르신, 80살은 족히 되어 보인다. 깊이 팬 이마의 주름은 굴곡진 우리나라의 역사 서적과 같다. 이 세대의 아버지는 한 가정의 기둥이었고 대한민국의 구세주였다. 나라의 지도자를 잘못만나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을 겪고 4.19혁명을 겪었다. 산업혁명이라는 명제 하에 저임금과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이 나라를 후진국에서 선진국 대열로 이끈 산 증인이요 주인공이다. 그럼에도 어르신들을 나라의 세금을 축내는 늙은이, 지하철을 무임승차한다고 해서 지공거사라 칭하며 조롱한다. 가정에서는 한 어른이 아닌 짐짝처럼 버림받는 슬픈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손자에게 티비 채널권 빼앗기고 심지어 애완견에게 밥을 먼저 먹인다. 개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있다니 슬프다. 그럼에도 우리의 아버지는 파지 팔아 모은 돈, 공공근로에 나가 모은 돈, 경로수당으로 받아 모은 돈을 그래도 내 자식이라며 죽는 날까지 사랑을 베풀며 통장의 비밀번호를 알려준다. 불효막심한 자식들아, 이것이 진정 부모의 마음이다. 혹여 불효를 저지른 자식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반성하길 바란다.

정겸(시인/한국경기시인협회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