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협의는 만나서 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효율적인 것에 동의하면서, 동시에 SNS와 내부통신망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합니다. 실장, 과장, 주무계장을 그룹으로 하는 카톡방을 만들고자 합니다. 전자 편지를 수시로 보고, 메일도 자주 열 것 입니다. 긍정의 마인드로 세상을 보고 민원인의 입장에서 판단하며 물건을 파는 점원의 심정으로 업무를 추진하면 참 좋을 것입니다. 갑이 아니라 을, 병, 정이 되는 역할연기도 재미있는 놀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회의실 배치는 원탁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외부인사는 가급적 상석에 배치하고 공무원은 주변에 자리 잡는 것이 좋겠습니다. 국장이 위원장인 경우에도 원탁이나 사각형으로 배치하고 (표 나지 않게) 외부 인사를 상석으로 모시도록 하고자 합니다. 외부인사와 과장님, 팀장님들이 회의 중 국장과 논의할 사안이 발생하였다면, 국장과 실장을 해당과로 부르시면 됩니다. 다수인원이 이동하는 것보다 국장이나 실장, 부시장이 수첩 하나 들고 그분들이 계신 곳으로 가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출장, 연가, 외출, 기타 공사무의 경우 간단한 내용을 메시지로 보내거나 메모, 기타 SNS, 내부 통신망을 최대한 활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흑인 마을 청년들이 아침 일찍 일터로 가는 길에 물살이 빠른 여울목을 건너야 하는데 이때 강둑에 던져진 검은 돌을 하나씩 안고 갑니다. 선교사들이 궁금하여 그 이유를 확인한바 청년들이 돌을 안고 가는 이유는 체중을 늘려서 물살을 이겨내기 위함입니다. 청년들이 물살을 견디기 위해서는 체중을 늘려야 하는데 마침 주변에 둥근 돌이 많이 있어서 잘 활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청년들이 가슴에 안고 가는 돌은 그 사람의 체중에 반비례합니다. 즉, 체중이 가벼운 청년은 무거운 돌을 들어야 하고 체중이 좀 나가는 경우에는 가벼운 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살펴본 결과 자신의 체중이 50kg나가는 청년은 30kg 정도 나가는 돌을 선택하고 60kg의 체중이라면 20kg의 돌을 가슴에 안고 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과 돌의 무게를 합해서 대략 80kg의 무게를 확보하고 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이 같은 무게의 기준은 지난 수 백년, 수 천년을 살아온 이들 부족사회의 경험칙일 것입니다. 그동안 장마에 떠내려간 아이들, 물살에 넘어져 다친 이들이 아주 많았을 것이므로 그때마다 물살을 적정하게 견뎌내는 돌의 무게와 물살을 이겨내
### 사자와 호랑이는 빠른 다리와 날카로운 송곳니로 살아갑니다. 시원한 오후에 5분짜리 사냥을 해서 영양 한 마리를 잡은 6마리 사자가족은 만찬을 즐긴 후 잠을 자고 다음날 오전에도 게으른 눈으로 주변을 굽어보며 그냥 존재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아마도 호랑이도 일순간 달려가 먹이 감을 낚아채면 2~3일은 먹고 사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늪지대 악어도 지나가는 누(소와 비슷한 동물) 뒷다리 잡아채 물속으로 끌어가 익사시킨 후 아내 악어와 빨래 짜듯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몸통비틀기를 하여 먹이를 나누면 보름정도는 물만 먹으며 소화시킬 것입니다. 또한 대부분의 동물들은 한방에 먹이를 먹고 되새김질 하듯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자동차는 20년 내내 휘발유만 넣어주면 씽씽 달리고 그러다가 조금 미안하면 엔진오일 갈아주고 미션오일 보충하면 그만입니다. 가끔 공기압 살펴보고 플러그 전선줄 갈아주면 그저 고마운 일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참으로 필요한 소품이 많습니다. 큰 물건으로는 미사일, 여객기, 덤프트럭, 아파트, 100층 빌딩이 필요합니다. 百貨店(백화점)은 이제 千(천)화점 萬(만)화점이 되었습니다. 백화점에서는 주로 마른 물건을
### 1983년에 퇴임하신 공직 선배님이 퇴직하시는 날까지 사무실에서 비품대장과 소모품대장을 정리하시고 추운 겨울날 1월 중순에 자택에서 도장 결재를 하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후배들의 송별 기념품도 연거푸 정중히 거절하시고 다른 그 무엇도 그리하시므로 1984년부터 2009년까지 25년 동안 사무실과 집에 보관하다 선배님의 따님에게 전달한 일도 생각이 납니다.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이분의 사연은 훗날 이야기하기로 합니다. 오늘 아침에 불쑥 선배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32년 전에 만나 뵌 그분의 공직만큼 세월을 보내고 보니 공직이든 주변이든 모든 것들이 소중해 보인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엊그제 전주행사에서 가져온 테이블의 네임택, 회의서류, 3천원짜리 기념품이 더더욱 소중해 보입니다. 바쁘게 살면서 정신없이 키우고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아들딸이 소중합니다만 그 딸 아들이 결혼해서 낳은 손자손녀가 더더욱 사랑스럽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자식은 내리사랑이어서 아들딸 이상으로 손자손녀가 귀하디귀하다는 말씀에 대해 공감을 할 것 같습니다. 90을 바라보시는 장인어르신을 수 개월 만에 뵙고 악수하면서 인사드렸습니다. 외손녀딸 현아와는 아주 재미
### 1975년 비봉면 자안1리와 2리를 통 털어 80호에 500명쯤이 살았는데 비봉우체국 교환실에 매달린 교환식 전화 1대가 소통의 전부였습니다. 이종근 이장님 댁에 설치된 이 전화기는 설치당시 배정받은 분의 소유이므로 다른 분이 이장을 이어받았지만 직인과 부책만 넘어가고 전화기는 그대로 구이장님 댁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장은 아니지만 전과같이 공공성있는 전화기의 기능은 계속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따라서 서울에 나가 사시는 집안 어르신의 자안리 거주 친척간의 통화매신저역할에는 달라짐이 없습니다. 봉재야! 서울에서 전화 왔으니 전화 받아라. 이봉재 아저씨가 구이장댁에 가면 전화는 끊겨있고 10분 기다리면 다시 서울에서 전화가 와서 통화를 하시는 것입니다. 전화를 걸 일이면 교환실에 서울번호를 신청하고 기다렸다가 연결되면 통화하고 다시 교환양에게 몇 통화인가 물어 그 요금을 구이장님께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여유롭게 기다려야 합니다. 급하게 서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1977년에 면사무소 발령을 받았습니다. 행정전화가 울리는데 아무도 받으려 하지 않아 수화기를 들려하자 그냥 두라고 합니다. 알고 보니 군청 행정전화 라인에 4개면이 매달려
### 수년 전에 공업용 '우지라면'사건이 크게 보도되어 온 국민이 관심을 가졌던 일이 있었습니다만 공업용 우지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소에서 기름을 발라낼 때 공업용으로 쓸 요량으로 비위생적으로 관리하여서 문제가 된 것으로 압니다. 소를 도축하면 나오는 흰색 덩어리 기름은 식용보다는 공업용에 쓰이고 있다 합니다. 하지만 1970년대 우리의 시골 정육점(푸주간)에서 매주 매일 강조하는 오늘의 표어는 "고기는 냉장고에 있습니다."라는 흰 바탕에 붉은색 아크릴 표찰입니다. 좋은 고기는 냉장을 해야 하니 쇼윈도우에 걸어두지 못합니다. 그러니 혹시 손님들이 고기가 떨어져서 없는 줄 생각하고 발길을 돌릴 수도 있으므로 고기가 많이 준비되어 있다는 의미의 아크릴 표찰을 내걸었던 것입니다. 증조할아버지 제사를 맞이하여 어머니께서는 초등생 아들에게 5km 걸어가서 다시 걸어오는 면사무소 인근 윤씨 정육점에 가서 소고기 반근(300g)을 사오라 하십니다. 말표 검정색 고무신을 신고 타박타박 걷고 걸어서 두 고개를 넘어 면소재지 중심부에 자리한 정육점에 도착합니다. 소고기 반근을 주문하니 炙(적)꺼리냐 찌게꺼리냐를 물으십니다. 어머니 말씀대로 적거리라 답하니 마블링으로 기억
### 이제부터 자신을 소개하는 자료에 경희대학교 국문과 주관 전국 고교생 백일장에서 4등을 하였다는 사실을 표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동안에는 비봉중학교 수성고등학교 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과 경기대학교 행정대학원 도시및지역개발행정 전공 석사를 학력으로 내놓았는데요 고등학교 3학년인 1976년 10월8일에 받은 상장을 이력에 넣기로 하였습니다. 당시 상장문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982호 상장 산문부 참방(장원 차상 차하 참방- 참방은 4등임), 수원 수성고등학교 이강석, 위 사람은 경희대학교 학도호국단 주최 제12회 총장기 쟁탈 전국 남녀 고교생 백일장 대회에서 두서와 같이 입상하였기에 상장과 부상을 드립니다. 1976년 10월8일 경희대학교 총장 조영식. 상장과 함께 받은 한자 옥편은 지금도 잘 보관하고 가끔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대학에 원서를 냈고 거기서 낙방하고 공무원 9급 시험(당시 5급을류)에 합격하고 후기대학 떨어지고 공무원의 길로 들어서서 이제 39년8개월을 기록하고 명퇴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참 짜릿한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날 수상으로 인해 가슴속에 마음속에 문학 DNA가 백혈구처럼 증식되어 온몸을 떠돌기 시작하고 지금
### 앉아서 생각하면 글이 나오는 것은 아니라 하고 그래도 글을 쓴다고 자부한다면 자신의 존재가치를 위해서도 글쓰기가 어렵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글을 쓰는 일은 힘든 것은 아니지만 쉽지도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써놓고도 세상에 내놓기가 어려울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이 글을 나의 생각을 쓴 것이요 하면서 사람들에게 보인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젊은 시절 언론사와 수시로 연결하면서 글을 써서 신문에 기고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으로 겁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얕은 생각과 부족한 지식으로 수많은 독자들이 보게 되고 후대에 자자손손 역사에 남을 신문인데 설익은 생각과 척박한 의견을 제시한 것이 송구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글쓰기가 겁이 나는 것을 보니 조금 나이가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른바 철이 든다는 말은 계절을 알지 못하는 '철부지'가 아니라 시와 때를 아는 '철을 안다'는 의미로 생각합니다. 정말로 철부지 시절에는 세상의 모든 것이 청춘을 위해 존재하는 듯 생각했습니다만 돌이켜 곱씹어 보니 이 세상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서 연결되어 3.1정신과 8.15와 6.25와
### 필요하면 찾게 됩니다. 화성군 팔탄면 사무소에서 회계업무를 보다가 경기도농민교육원으로 전근되어 또다시 서무회계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매일매일 이런저런 구매가 있고 강사님 수당을 드리기 위해서는 경기은행에서 공금수표를 현금으로 찾아와야 합니다. 철물점도 가야하고 약국에서 구매할 것도 있습니다. 식품은 매일매일 배달차가 와서 신선한 야채와 곡식, 육류, 생선 등을 가져옵니다. 매일 오전에 한번 시장과 은행에 가야하고 가끔은 경기도청 총무과 회계과 지방과를 들러야 하는데 차량은 4대, 운전하시는 분은 3명으로서 통근버스 운전자는 승용차를 운전하는 임무를 받지 않았으니 매번 부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적극적인 자세를 가진 공무원은 이일 저일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겠지만 서무 회계와 달리 운전업무는 늘 책임이 뒤따르는 법이니 우리 공직의 업무구조상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기는 참 어렵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거나 오히려 과거보다 현재에는 불필요한 책임소재로 인해 조직의 창의력을 발휘하는데 걸림돌이 더 많아 보입니다. 농기계 교관들은 운전면허가 있으므로 급할 때 부탁을 하였지만 이 또한 3년1개월을 근무한 사업소 생활
### 오늘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안 되는 날이 있습니다. 글을 쓰려하나 키보드가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더더욱 그런 느낌이 들어서 걱정입니다. 깊은 생각에 잠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붓으로 책을 집필하고 해방 전후에 잉크를 찍어 펜촉으로 원고지를 메워갔다고 하는데 요즘 작가들 중에는 키보드를 이용하여 빠르게 글을 쓰기도 합니다. 물론 들어보면 아직도 만년필로 12,000장의 원고지에 꾹꾹 눌러쓰는 맛으로 글을 쓰시는 김홍신 작가가 있습니다. 앞으로는 과학계가 조금 노력하시면 키보드를 이용하여 마구 생성되는 글과 문장을 빠르게 정리하시는 기술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눌러쓰는 글씨에서 오는 문장의 깊은 소고기 국물 같은 무게감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키보드는 펜글씨보다 빠르게 진행될 수 있습니다. 더 나가면 우리의 생각을 읽어 타자해 주는 첨단 기기와 스마트폰 어풀이 개발되어 시장에 나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은 혹시 작가님의 머릿속에는 이미 여러 권의 책이 들어있는데 이를 연도에 맞추고 주변의 상황을 보아가면서 내어 놓으시는 것인가 하는 상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평소에 나기 보다는 키보드를 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