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고위 관리가 임명될 무렵이 되면 각 언론에 하마평이 무성하게 오르내린다.
하마평이란 새롭게 관직에 오를 후보들에 대한 세간의 평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하마평의 기원이 재미있다.
예전에는 궁 앞에 모든 관리들이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하마비(下馬碑)가 있었다. 군주가 머무는 곳이니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이곳에서 관리들이 내려 궁으로 들어가고 나면 남은 마부들끼리 쑥덕공론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나리가 판서가 된다네그려” “예끼 이 사람아! 이번에는 우리 나리 차례야” 등등.
이렇게 하마비 앞에서 이루어진 세평이라고 해서 하마평이란 말이 생겨났다.
이 코너에서는 공무원 인사철을 앞두고 경기도에서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동두천시, 오산시, 남양주시에서 부단체장을 역임한 이강석 전 부시장이 직접 겪은 인사철 에피소드 몇가지 조언들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화성군 비봉면사무소에 처음 발령을 받고 만난 분은 안 선배입니다. 선배는 당시 회계담당자로서 이강석과 김OO 서기보가 발령을 받고 온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군청에서 읍면에 발령대상자를 2~3일 전에 미리 공문으로 알린다는 사실을 당시에 신규공무원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군수님 발령장을 들고가서 인사하면 그제서야 발령사실을 아시는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군청 공문이 면사무소에 왔을 것이고 남자 한명과 여성공무원 한 사람이 비봉면사무소에 발령된 것을 알았고 이름도 확인되었으며, 특히 이강석은 비봉면 자안1리 출신이라는 것도 파악되었던 것입니다. 이른바 본면 직원이 대부분이던 시절이니 이번에는 어느 동네에서 공무원이 오는가 하는 것도 궁금한 일이었습니다. 대략 비봉면사무소에는 25명이 근무했는데 23명은 본면 출신이고 인근의 면에서 잠시 발령받고 와서 근무하는 직원은 2명이내였습니다. 얼마후에는 다른 면에서 근무하던 본면 출신 공무원이 복귀하기도 하고 근무 중에 군대를 가거나 타 기관으로 전근을 가기도 했습니다. 안 선배에게 인사를 하고 발령 후 사무실에 출근을 하였고, 훗날 교사로 전공을 찾아간 강 선배의 후임으로 서무담당이 되었습니다. 저는 서무담당이
어느 기관이나 회사나 인사발령은 큰 관심사다. 드라마에서 보면 회사의 인사발령은 로비에 종이 몇 장 붙이는 것으로 발표된다. 사원들이 삼삼오오 기웃거리며 인사발령 A4 용지를 보면서 의외의 인물이 발탁되거나 열심히 일했지만 회사의 영을 어긴 일로 해서 좌천되는 발령에 직원들이 호들갑을 떠는 장면도 볼 수 있다. 1980년대 공직사회의 인사발령은 하나의 커다란 잔치였다. 인사발령이 나면 잘된 사람 신나서 한잔, 오리알 된 직원 격려하느라 두잔. 그래서 관가 주변은 인사발령으로 경제가 활성화된다고 하며 당시에 근무중인 강원도청에서 모 직원이 분석한 바에 의하면 200명 인사발령은 7억원의 경제효과가 있다고 주장한 바도 있었다. 인사작업이 있다는 소식이 들리고 많은 나날을 지낸 후 어느 날 오후 사무실의 차임벨이 울리면서 인사발령은 시작된다. 그 당시 인사 담당자가 수없이 바뀌어도 인사발령 멘트는 변하지 않았다. “1987년 5월 30일자 인사발령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낭랑한 목소리가 방송을 타는 순간 사무실은 물론 복도에 있던 직원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다. 방송이 끝나는 순간부터 사무실은 분주해진다. 인사발령 나발을 부는 것이다. 인사발령지가 팩스를
'하마평'이라면서 공무원 승진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고 승진의 길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하게 됩니다. 공무원 승진은 임박한 발령사항을 미리 염탐해보는 정도의 과정인 것이고 정작 중요한 일은 자신이 공직에서 어떤 태도로 일하느냐가 향후, 장차에 승진의 길이 빨리 열리는가 아닌가를 가늠한다 할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시절, "라떼시절"을 소개해 봅니다. 이 시대의 공직환경에 걸맞은 것은 아닐지라도 기본의 틀은 동서고금에 틀림이 없는 고전읽기처럼 참고하시면 뼈가되고 살이되는 '된장찌개'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세정과에 근무하면서 조성범 지적계장님과 이화수 평가계 선배님 등 3명이 매일아침에 사무실 청소를 하고 구내식당에 가서 커피를 한잔 하면서 좋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명감, 종교의식처럼 아침마다 넓은 사무실 전체를 청소하고 차마시고 돌아오면 한분 두분 출근을 하십니다. 새벽을 서두르는 부지런한 새를 당할 수 없습니다. 부지런한 공무원을 이기지 못합니다. 세상사는 이치와 좌우명은 근면성실인데 여기에 더 보탬은 바로 부지런함입니다. 이후에도 공직생활을 하면서 늘 일찍 나갔습니다. 행사장에도 일찍 가고 사무실에도 서둘러 가고 약속장소에도 즈금 일찍 갔습니다. 도지사
대화기법을 제시한 좋은 글을 보았습니다. ▲말 한마디에 천금이 오르내린다 ▲훌륭한 말은 훌륭한 무기다 ▲오늘 생각하고 내일 말하라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 ▲길은 갈 탓이고 말은 할 탓이라 ▲유쾌한 대화, 유쾌한 말 ▲한 번 던진 말은 어디든지 날아간다. 舌禍(설화)의 의미를 사전에서 보면 연설이나 강연 따위의 내용이 법률에 저촉되거나 타인을 노하게 하여 받는 재난, 타인에 대한 중상이나 비방 따위로 받는 재난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세상사에서 말로 풀어낼 수 있는 일이 많지만 말로 인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더 많은 듯 보입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의 빚을 갚는다는 말이 현대의 실생활에서 통하고 있습니다. 불협화음이 있을 때 일방이 먼저 진솔하게 신속하게 사과를 하면 해결되고 이전보다 敦篤(돈독)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인데, 서로 자존심을 앞세워 사과를 하지 않아서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는 사례를 보았습니다. 공직에서 말을 잘해서 승진하고 출세를 한 경우가 있고, 말로 인한 舌禍(설화)를 입어서 공직발전에 후진기어로 밀려난 경우도 보았습니다. 한마디만 참고, 말의 강도를 조금만 낮췄다면 발생하지 않을 일인데 말을 과하게 해서 징계위에 올라가는 경우가
갑질이란 조금 우위에 있거나 고용관계 사주의 불공정한 근로관계를 지적하는 말로 시작된 듯 한데요, 그 상황이 사회 전반에 퍼지면서 업무 추진과정에서의 작은 갈등과 논쟁조차 갑질이라는 무대에 올려놓고 공격하고 비난하고 사회적인 처벌을 하기도 합니다. 기업체 사장이 운전기사에게 인격적인 모멸감을 준 것이 단초가 되어서 사과를 하고 공직자가 업무 처리과정에서 좀 더 좋은 대안을 마련하고자 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언어폭력이라며 갑질로 분류되어 처벌을 받은 사례도 많습니다. 더구나 국민의 관심과 사랑을 수입원으로 하는 탤런트, 영화배우, 정치인은 ‘공인’이라 해서 사회통념에서 조금 벗어난 행동으로 공분을 사고 결국 공개사과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혹자는 이것도 사회적으로 공격을 받을 일인가 하는 정도의 언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다수가 그렇게 생각하고 언론이 그처럼 끌고가는 경우 돌이킬 방법이 없습니다. 물이 허리위까지 차오르면 스스로 몸을 가누기 어려운 것처럼 사회적으로 비난을 하고 언론에서 반복하여 보도하면 이른바 대세에 밀리게 됩니다. 그러니 갑질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갑질이란 이 일을 이렇게 했으면 한다고 할 것을 ‘이렇게 밖에 못하나?’라고 해도 갑질로
도지사와 시장군수의 인사발령은 단체장의 권력중 가장 큰 힘을 가진 행정행위라고 봅니다. 인사발령을 거부하면 공직을 그만두고 집으로 가야 합니다. 인사발령은 논산훈련소에서 이발병, 목공, 석공 주특기를 데려가고 남은 자원을 보병으로 보내는 군대식이 아니라 100명을 100자리에 보내야 하는데 행정, 보건, 토목, 건축, 위생, 환경 등 다양한 직열이 있고 9급부터 4급까지 직급이 있는 공무원을 개개인에게 맞춰서 자리에 보내야 하는 고도의 과학과 수학적 고충을 내포한 사람배치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6급은 많은데 주사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마평 인사는 많은데 정작 발령은 쉽게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6월중에 상방기 부시장 인사를 해야하고 그 속에서 실국장이 자리를 바꿔야 합니다. 연말인사는 더더욱 힘들어서 교육을 마치고 온 간부와 현재 근무중인 공무원중에 그만큼의 인원을 교육대상자로 지정해야 하는 더더욱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니 인사발령이 나거든 그대로 수용하고 잘된 인사라고 평가해야 합니다. 누구도 이만한 인사배치를 잘 할 수 없으니까요. 더구나 그 와중에 챙겨야 할 인물이 몇 명 있다면 더더욱 힘든 인사과정이라 할 것입니다. 인
1980년대 관선시절의 인사발령 징후는 몇가지가 있었습니다. 가장 확실한 경우는 인사계차석이 서류봉투를 들고 서울 광화문으로 출장을 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당시에는 도청 과장은 국비공무원이어서 내무부(행정안전부)장관의 승인을 받았고 인사내용이 관보에 게재하던 시절입니다. 요즘에는 도지사가 발령하고 곧바로 인터넷 기사에 오르고 연이어 청내 인터넷망에 인사발령사항이 올라와서 대략 10분안에 전 직원이 인사발령사실을 인지하고 그 내용을 소상하게 파악하게 됩니다만 인터넷 이전 세대에게 인사발령 정보는 참으로 귀하여 접하기 어려운 보석과도 같은 첩보수준의 정보였습니다. 첩보란 정보의 출처를 밝히지 못하거나 말하기 어려운 곳으로부터 받은 자료이고 정보는 인사과나 국장실을 통해 전해받은 공공연한 자료를 말합니다. 그래서 간부에게 보고할때 첩보인가 정보인가를 사전에 전제하고 보고를 시작해야 합니다. 첩보를 말하는데 누구한데 들은 이야기인가 질문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인사발령 징후로는 어느날부터 국장님, 과장님의 호쾌한 결재가 다소 지연되고 느슨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결재판을 가져가면 즉시 결재하시던 국장님이 자꾸만 내용을 검토하면서 사소한 이유를 들어 재검토를 요구한다는
경기도청사가 새로 지어진 광교 청사에 입주했습니다. 1965년에 법이 제정되었고 이법을 바탕으로 수원 청사를 신축하여 경기도청 광화문 시대를 마감하였고 1967년에 수원청사에 입주하여 2022년 상반기까지 팔달산 시대 55년을 마감한 후 이제는 광교청사 시대를 활짝 열었습니다. 최근에 퇴직한 공직자들이 팔달산 청사에 방문하니 청사의 썰렁한 분위기에 마음 둘 곳이 없다는 글을 사진과 함께 SNS에 올리기도 합니다. 그동안 여러 번 팔달산 청사를 방문하였고 아직 남아있는 도청 사무실에 가서 업무를 보기도 하였습니다만 역시 공무원과 도민이 떠나간 팔달산 도청의 텅빈 주차장처럼 사무실도 썰렁할 것이라 예상해 보기도 합니다. 1984년부터 수십년간 근무한 사무실이니 어느 건물 몇층에 ##과 사무실이 자리했던 모습과 계 배치까지 성성하고 3년동안 차지했던 자리에는 워드프로세스 작업을 하느라 발가락에 힘을 주어 바닥이 닳아서 생겨난 흔적조차 사진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청춘을 거쳐 장년이 되기까지 일주일 내내 출근하고 점심시간에 몰려나와 식사 후 다시 들어가고 외식하고 어두운 길을 통해 올라가서 일했던 각자의 추억이 남은 손길이 기억나고 눈길을 추억하는 경기도청의
시청 신규공무원을 위한 강의를 하면서 '시보'떡 이야기를 하였는데 3시간 후에 담당 팀장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다음번 강의에서는 '시보떡 이야기'를 하지 말아달라 당부를 합니다. 이날 강의에서 9급 공무원에 임용된 1977년에는 1년간 시보임용이 있었고 요즘에는 6개월로 단축이 되었는데, 이 시보기간중에는 임용권자가 역량이 미달하는 공직자는 공무원 자격을 회수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 시보기간을 넘기면 공무원 자격문제는 한 단계 올라간 것이니, 지난 1년 또는 6개월간 자신이 수습받는 어려운 기간동안 도와주신데 대한 감사의 의미로 소속 과에 '시보떡'을 돌린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동시에 첫 월급을 받으면 반드시 어머니께는 붉은 내복을 사서 드리고 아버지, 형제자매에게도 적정한 선물을 하는 것이 아름다운 관행이라는 점을 설명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인터넷 기사를 자세히 읽지 않았던 탓에 강의 일주일 전쯤에 발생한 '시보떡 사건'을 몰랐습니다. 행정안전부에서 지방자치단체 모든 기관에 시보떡 금지 공문서가 도착된 상황이었습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합니다. 서울시의 어느 9급공무원이 공무원에 합격하여 어려운 살림을 끌어가고 있었습니다. 부모님
경기도청의 인사는 규모와 과정이 크고 복잡하다보 봅니다. 인사부서에 근무한 바가 없으니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인사부서 경험자들로부터 듣고 기억하는 내용을 종합해 보면 6월말 하반기 인사를 발표하기 까지 5월, 6월은 준비와 진행, 협의와 조정의 기간이라 할 것입니다. 5급 사무관이 되어서 시군교류로 동두천시 생연4동장으로 2년간 근무한 후 경기도청으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동두천에는 다른 자원을 보내기로 협의를 마쳤는데 당초 공보관실로 배정하려던 계획이 본청내 사무관 이동배치 조율이 늦어지는 바람에 무산되어서 급한대로 잠시 비어있던 소방재난본부 상황2담당으로 보임되었습니다. 소방본부에 행정직이 근무하게 된 이유는 도청의 3교대 상황실과 소방의 2교대 상황팀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각각 정원을 살려나가기 위해 합동 근무를 하게 되었던데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4개월간 소방재난본부에서 보람차게 일하고 소방의 역량과 근무스타일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고, 소방 관련 시설투자 예산을 확보하는 로비스트 역할도 하였던 좋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방공무원의 희생정신과 일단은 출동하는 '국민새랑' 공직관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